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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뽕'할 때 아니다.시진핑이 저급 애국주의 제동건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1. 2018년 11월18일 쑤저우에서 열린 국제마라톤 대회. 결승선을 500m 앞둔 지점에 이르자 중국 선수 허인리(何引麗)는 에티오피아 선수와 1위를 놓고 접전을 벌이다 막판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성 자원봉사자가 불쑥 도로로 튀어나왔다. 허인리에게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허인리는 계속 달렸다.

[사진 CCTV캡처]

[사진 CCTV캡처]

스퍼트를 올리다 속도를 줄여 국기를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승선 100m 지점. 여전히 접전을 펼치고 있던 허인리 앞에 또 다른 자원봉사자가 달려들어 기어이 국기를 쥐어줬다. 에티오피아 선수는 자원봉사자와 충돌할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을 간신히 모면했다.

중국공산당 당중앙 문서에 인터넷용어 등장 #맹목적 애국주의 분출 일컫는'고급흑''저급홍' #중국몽 앞세워 공세적 대외정책 펴다 역풍 맞자 #수세적 외교노선인 도광양회 카드 다시 만지작 #

허인리는 국기를 쥐다 떨어뜨렸다. 그 사이 빈손이었던 에티오피아 선수는 결승선을 향해 질주했고 1등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허인리는 5초 차로 준우승했다. 1~3등으로 결승선에 들어오는 중국 선수는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들어와야 한다는 규정이 빚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자원봉사자는 집념 있게 국기를 건넸고 박빙의 승부처에서 국기를 놓친 허인리는 자책감 속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진 CCTV캡처]

[사진 CCTV캡처]

#2. 2018년 8월 헤이룽장성 이란현 인민법원이 홈페이지에 올린 한편의 홍보글을 올렸다.이란현 법원은 “한 여직원이 28일째 집에 안가고 연속 근무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으며 열심히 일했다”고 밝혔다. 직원의 이름은 볜모란(卞默然). 업무 완수를 위해 사무실에서 몇 시간 자고 일했다는 것이다.

[사진 인민망]

[사진 인민망]

#3. 2019년 3월 11일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회의장. 대만 국적의 링유스(凌友詩)는 정협 위원 신분으로 양안의 통일을 지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링은 동화 구연하듯 속삭이는 말투와 애절한 곡조로 연설문을 읽었다.

링이 취한 연설 스타일을 놓고 인터넷에선 애국이냐 아니냐 아부가 지나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사진 신화망]

[사진 신화망]

세 사례는 요즘 중국 인터넷에서 종종 거론되는 ‘저급홍(低級紅),고급흑(高級黑)’ 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저급홍, 고급흑은 무슨 말인가. 저급홍은 애국주의적 열정에 휩싸여 앞뒤 안가리고 한 일인데 실제로는 역효과를 내는 경우를 일컫는다. 빗나간 애국주의란 얘기다.

고급흑은 뜻이 좀 미묘하다. 바이두백과는 고상하고 교양있는 표현이지만 내용상 냉소를 담고 있는 말을 뜻한다고 정의했다. 고급흑은 그 말을 쓰는 상대의 의도와 후속 행동까지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고급흑이냐 아니냐는 논란이 일곤 한다.

저급홍을 보여주는 대표 사건이 #1이다. 중국에선 쑤저우 마라톤 오성홍기 사건으로 불린다. 이 사건은 중국 밖에서 웃음거리가 됐고 중국에서도 "스포츠의 룰조차 무시한 행위는 애국이 아니라 나라 망신"이라는 자성이 일었다.

‘모란언니(默然姐姐)’ 사건도 저급홍의 단면을 보여준다. ‘당에 대한 헌신, 인민을 위한 봉사’를 선전하려는 게 법원의 의도였겠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28일간 얼굴만 닦고 일했다면 주변에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틀에 박힌 관료주의적 선전 관행에 따라 모란언니를 홍보했지만 오히려 역풍만 초래한 것이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3 사례는 고급흑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만 국적자가 정협 대표로 나와 양안의 통일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연설 형식이나 내용이 과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찬양이 지나쳐 도리어 먹칠하는 것과 다름 없는 역효과를 불렀다는 것이다. 링유스의 진의를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일고 있다. 겉으로 봐선 칭찬인데 따지고 보면 우회적으로 깎아내리거나 비판하는 고급흑, 이른바 돌려까기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게 온라인에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는 두 단어가 중국공산당 한복판까지 진출했다. 2019년 양회 개회를 앞둔 2월말 중국공산당은 ‘당 정치건설 강화 의견’을 냈다. ‘의견’에선 중국공산당의 5대 문제를 인정했다.

관료주의가 뿌리박힌 중국공산당에서 오류를 인정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5개 문제 가운데 언론의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었다.

“올바른 인식과 올바른 행동으로 두 가지를 지켜내야 한다(两个维护). 저급홍이나 고급흑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인터넷에서 통용되던 ‘저급홍(低級紅),고급흑(高級黑)’이 고명한 당중앙의 문서에 버젓이 올라간 것이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무슨 이유일까. 무슨 이유 때문에 권위 있는 당중앙의 문서에 인터넷에서 떠돌던 단어를 쓰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걸까. 

중화권 언론에선 시진핑 정권의 대외노선에 미묘한 변화가 일고 있는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화웨이의 5G 장비 채택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집중 견제, 서구 사회의 중국경계론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저급홍·고급흑 같은 맹목적 애국주의, 빗나간 애국주의가 공연히 외부 세계의 경계심만 높이는 역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1978년 개혁·개방 직후 중국 대외정책의 근간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조금 거칠게 단순화하면 '실력을 키울 때까진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는 정도의 뜻이다. 도광양회를 기치로 지난 40년간 중국은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국력을 크게 키웠다. 미국과 유럽의 집중 견제를 피하며 부족한 기술력과 산업생산력을 신장시킬 수 있었다.

[사진 영화'대단하다,우리나라' 홈페이지]

[사진 영화'대단하다,우리나라' 홈페이지]

하지만 도광양회는 유소작위(有所作爲·할 바를 하자)와 자리를 다투더니 대국으로 일어서겠다는 대국굴기(大國崛起), 천하 패권을 잡겠다는 시진핑의 중국몽 앞에서 곁방으로 물러났다. 중국몽의 위세는 2018년 3월 개봉한 홍보 다큐영화 '대단하다,우리나라(厲害了,我的國)'로 정점을 찍었다. 과시성 민족주의적 대외정책이 도처에서 분출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일대일로다.

그런데 대외환경이 돌변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의 집중 견제가 본격화되자 수세에 몰린 중국공산당. 다시 도광양회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철저하게 로우키로 대처하고 있다. 이런 전략변화 상황에선 맹목적 애국주의 이른바 '국뽕성' 행동은 도움이 되기는 커녕 짐만 된다는 인식이 당중앙 명의로 낸 ‘의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저급홍이든 고급흑이든 국뽕할 때 아니라는 현실의 무게가 당중앙의 의견에 담긴 것이다.

차이나랩 정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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