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왕 전문 배우’ 임호, 데뷔 26년 만에 첫 음악극 연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이상원의 소소리더십(42)

'사극 전문 배우', '왕 전문 배우'. 임호에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데뷔 26년 차 배우로 사극보다는 현대극을, 왕 역할 보다는 그 외의 역할을 많이 했음에도 팬들은 그를 ‘왕’으로 기억한다.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고려 말 충신 '정몽주' 역할로 열연했음에도 팬들은 여전히 그를 ‘왕’으로 기억한다.

그런 그가 연극 연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는 소식을 접했다. 듣자마자 ‘연기경력은 오래됐지만, 연출은 처음이잖아? 새로운 도전 앞에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졌다. 소탈한 사람들의 소박한 도전 이야기 ‘소소리더십’이 연출 신인 임호에게 잘 어울리는 기회라는 생각에 인터뷰 요청을 했다. “연예면 이외의 인터뷰는 거의 처음인데, 재미있고 뜻깊을 듯하다”며 흔쾌히 응했다.

올 5월 코미디 음악극 <렌드 미 어 테너(Lend Me a Tenor)>로 첫 연출에 도전하는 연기경력 26년 차 배우 임호.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39;정몽주&#39; 역할로 큰 사랑을 받았다. 사진은 <정도전> 촬영 중 대본 연습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올 5월 코미디 음악극 <렌드 미 어 테너(Lend Me a Tenor)>로 첫 연출에 도전하는 연기경력 26년 차 배우 임호.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39;정몽주&#39; 역할로 큰 사랑을 받았다. 사진은 <정도전> 촬영 중 대본 연습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첫 연출 작품 <렌드 미 어 테너(Lend Me a Tenor)>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프로듀싱한 명품 코미디 음악극입니다. 전설적인 테너가 오페라 ‘오델로’ 공연 날 아침 사망했다는 오해를 받고, 테너 지망생이었던 조수가 그로 분장해 무대에 올라 훌륭하게 공연을 치릅니다. 나중에 테너가 깨어나 ‘오델로’가 두 명이 되면서 점점 꼬여가는 상황을 그린 작품입니다. 재미도 있지만 소극장에서 테너와 소프라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아주 독특한 기회를 선사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우로는 오랜 경력을 자랑하지만, 연출은 처음인데 어떤 기분이세요?
제가 1993년에 연기자로 데뷔했으니 벌써 25년이 넘었네요. 26년 차 배우지만 연기할 때마다 여전히 긴장됩니다. 그러니 새로운 도전 앞에서는 어떻겠어요? 훨씬 떨리고 긴장이 되죠. 다만, 원하던 새로운 도전이라 기대감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원하던 도전이라면, 연극 연출 기회를 꿈꿨다는 말씀이지요?
사실 연극무대가 아주 낯설지는 않아요. 교수, 연출가가 되고 싶어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연극이론을 전공했어요. 우연히 배우로 데뷔해 지금까지 왔지만 중간중간 강의도 하고 연극 무대에도 올랐습니다. 상명대학교, 청주대학교 등에서 외래강사로 강의하다가 2015년부터는 백석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현재는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학생들 연기지도를 하면서 졸업작품, 정기공연 등을 연출해 왔고 저 자신도 틈틈이 <선녀씨 이야기> 등의 무대에 서 왔어요.
백석대학교에서 학생들 연기 지도 중. [사진 임호]

백석대학교에서 학생들 연기 지도 중. [사진 임호]

그런 마음이라면 <렌드 미 어 테너> 연출 제의가 왔을 때 흔쾌히 바로 수락했겠네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의가 고맙고,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처음에는 망설였어요. ‘할 수 있을까? 해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에서요. 짧은 고민 끝에 두 가지 생각이 들어 하겠다고 했죠. 하나는 제작사에서도 내가 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으니까 제안했겠지.

또 하나는 나 스스로는 영역을 침범한다는 생각이 아니지만, 만약 그런 지적을 받으면 겸허히 받아들이자. 이렇게 있는 그대로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일단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를 받자는 생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그동안 연출의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회가 없지는 않았는데, 조금 두려웠어요. 운이 좋아 일찍 데뷔하고 나름대로 평탄한 길을 걸어왔거든요. 물에 빠지고, 발이 젖는 걸 무서워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배우 경력이 20년이 넘어가고, 학생들 가르치면서 생각이 아주 편해졌지요.

과거에는 성과, 성공 등을 바라며 주위의 눈치를 봤다면 이제는 성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실수하면 어떤가, 인정할 건 인정하고 또 도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즈음에 제안이 온 걸 보면, 세상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성경 말씀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22년(1980년~2002년) 동안 MBC에서 방영되었던 한국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39;금동이&#39; 역으로 열연했던 청년 임호. [사진 임호]

22년(1980년~2002년) 동안 MBC에서 방영되었던 한국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39;금동이&#39; 역으로 열연했던 청년 임호. [사진 임호]

그런 생각들이 학교에서 강의할 때 도움이 되지 않나요?
확실히 도움이 되죠. 하지만 제게 도움이 되는 것보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요(웃음). 학생들에게 “연예인, 스타가 되고 싶은 거냐 아니면 대중예술을 하고 싶은 거냐” 묻습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과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다릅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성공’을 바랍니다.

반면,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성장’을 바라지요. 제가 교수이지만 넓게 보면 학생들의 잠재적인 선배이기도 하잖아요. 배우로 26년 살아보니, 추구해야 할 것은 ‘성장’이라는 것을, ‘성공’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운 좋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학생들에게 “꿈을 너무 좁지 않게 포괄적으로 꾸어야 마음이 열리고 가능성이 커진다”고 얘기해 주고는 합니다.

책을 많이 읽고, 고민을 깊이 하고, 무거운 주제로 대화 나누기를 즐겨한다고 얘기했는데 참 잘 어울립니다. ‘왕 역할 전문 배우’라는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부친의 영향도 크지 않을까요? (그의 부친은 2017년 고인이 된 유명 사극 작가 故임충 씨)
잘 보셨습니다. 제게 조금이라도 학구열, 아카데믹한 부분, 진지한 성격,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자세 등이 있다면 모두 아버지 덕분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게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불 켜진 책상에 앉아 뭔가를 읽거나 쓰는 모습입니다. 『아리랑』 『지리산』 『임꺽정』 등의 책을 읽으라 하셨고 궁금한 걸 여쭤보면 자세하게 대답해 주셨어요. 지금 배우, 교수, 연출 등을 할 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정말 감사하지요. 정말 보고 싶고요.
아버지 故임충 작가와 함께(왼쪽). 부자가 출연해 화제가 됐던 양복광고 장면(오른쪽). [사진 임호]

아버지 故임충 작가와 함께(왼쪽). 부자가 출연해 화제가 됐던 양복광고 장면(오른쪽). [사진 임호]

배우로서의 임호 씨에 대해서 인터뷰하는 것은 아니지만, 딱 한 가지는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26년 연기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은 무엇인가요? 역시?
왕이요? 아닙니다(웃음). 사실 제가 왕 역할을 많이 한 건 아니에요. 데뷔작이었던 <장희빈>에서의 숙종과 큰 사랑을 받았던 <대장금>에서의 중종 역할 덕분에 많이 기억해 주시는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고 애착이 가는 역할은 2014년 <정도전>에서 연기한 정몽주 역할이에요. 작가, 연출, 배우 삼박자가 잘 맞았고 저 개인적으로도 인물 분석과 연기 준비가 잘 되었던 작품이죠. 덕분에 배우로서 자신감, 자존감, 신념 등이 높아질 수 있었던 고마운 작품이에요.
사극에서 왕이나 높은 벼슬 역할을 많이 맡다 보면 현실 세계를 보는 눈도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면이 없지는 않죠. 권력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조선 시대가 왕이 혼자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시대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아니더라고요. 왕이라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았고 시스템을 잘 갖추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없었지요.

잘은 모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각자 맡은바 자기 역할을 잘하면서 속한 단체를 위해 봉사하고 기여하는 마음이 없으면 오래 못 간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어찌 보면 상식이라 할 수 있지만, 사극 속에서 역할을 하며 살아 움직이는 교훈으로 배우니 실감이 가서 효과가 훨씬 큰 것 같습니다.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을 맡았던 유동근과 함께. 왕 전문 배우들이라 서로를 너무도 잘 이해해 최고의 연기를 할 수 있었다고. [사진 임호]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을 맡았던 유동근과 함께. 왕 전문 배우들이라 서로를 너무도 잘 이해해 최고의 연기를 할 수 있었다고. [사진 임호]

배우이자 교수이자 연출로서 숨 가쁘게 사는 요즘, 마음속에 키워가고 있는 꿈이 있으면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외국에서 연기든 연출이든 작은 역할이라도 하나 맡아서 해 보고 싶습니다. 방송국이나 상업적인 극단뿐 아니라 학교 등 아마추어 작은 무대라도 따지지 않을 겁니다. 외국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며 졸업작품 연출이라도 괜찮습니다. 한국과는 다른 시스템을 경험하면서 작게라도 역할을 해 보고 싶어요. 배우로라면 지금까지의 동양 배우, 한국 배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어느 시기라도 새로운 도전을 앞둔 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 한 마디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처한 상황은 다를지라도 ‘예술을 한다’는 마음으로 현재 맞닥뜨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보시라고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술이란 일상적인 것을 설레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처음에는 힘든 도전이겠지만 매 순간 설렐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곧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똑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상원 중앙일보 사업개발팀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