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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人流] 밀레니얼 세대의 새로운 놀이터, 찻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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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불었던 와인 열풍. 요즘 거리를 장악한 카페. 앞으로는 무엇이 트렌드가 될까. 조심스레 예측하자면 바로 차(茶)다. 차가 찻자리와 다회(茶會), 티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젊은 취향 애호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도구로 자리 잡은 차와 찻집의 최근 면면을 들여다봤다.
글=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사진=오종택·장진영 기자, 맛차차, 이이엄, 청년청담

요즘 '인싸'들은 차(茶)를 마신다 #차 맛과 공예의 아름다움 한 자리서 즐겨 #나는 문화적인 사람, SNS에 과시 심리도

최근 트렌디한 라이프스타일을 이끄는 지역에 찻집이 속속 생기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성수동 맛차차에서 젊은이들이 커피가 아닌 차를 마시며 강의를 듣고 있다. 오종택 기자

최근 트렌디한 라이프스타일을 이끄는 지역에 찻집이 속속 생기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성수동 맛차차에서 젊은이들이 커피가 아닌 차를 마시며 강의를 듣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일요일 오전 11시. 너른 통창 밖으로 서울숲을 마주하며 맑은 녹차 한 잔을 음미한다. 중앙 테이블에는 두 명의 차 선생님과 여섯 명의 손님들이 마주했다. 본격적인 티 코스가 시작되기 전 호박차를 마시고, 이맘때 봄에 나온다는 우리나라 야생 녹차 ‘중작’ 한 잔을 마시는 중이다. 차와 함께 내는 대추야자 다식도 별미다. 이어 제주에서 재배된 일본식 맛차가 등장한다. 다완(찻사발)에 맛차 가루를 넣고 차선(나무로 된 솔)으로 제법 진지하게 격불(거품을 내는 것)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오늘 특별히 준비됐다는 중국 윈난성의 품질 좋은 홍차 ‘운남전홍’과 고소한 호지차가 뿌려진 푸딩을 즐기면 약 1시간 반 남짓의 티 클래스가 끝난다.

약 6명 정도가 참여하는 맛차차의 프리이빗 티 클래스. 오종택 기자

약 6명 정도가 참여하는 맛차차의 프리이빗 티 클래스. 오종택 기자

서울 성수동의 찻집 ‘맛차차’에서는 일요일마다 소규모 티 클래스가 열린다. 차와 다식을 코스로 음미하며 차를 즐기고 자유롭게 질문도 한다. 회당 5만원정도로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항상 빠르게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20·30대로 보이는 이들은 주로 혼자 와서 조용히 차를 음미한다. 최근 들어 벌써 세 번째 티 클래스를 경험하고 있다는 김은희(28·공무원)씨는 “대만 여행 중 맛있는 차를 마셔보고 처음 차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차를 우리는 잠시의 틈이 정신없는 일상 가운데 느끼는 매력적인 여유”라고 했다.

맛차차의 ‘그린 마인드 바디’ 프로그램 . 요가 클래스와 티 클래스를 합친 것으로 15명 정도가 모여 차를 마시며 요가와 명상을 한다. [사진 맛차차]

맛차차의 ‘그린 마인드 바디’ 프로그램 . 요가 클래스와 티 클래스를 합친 것으로 15명 정도가 모여 차를 마시며 요가와 명상을 한다. [사진 맛차차]

요즘 ‘인싸’들은 차(茶)를 마신다

최근 커피가 아닌 차를 파는 공간이 늘고 있다. 성수동 맛차차, 연남동 오렌지리프, 청담동에서 최근 삼성동으로 주소를 옮긴 티컬렉티브, 서촌 이이엄, 한남동 산수화 등 주로 트렌디한 라이프 스타일을 이끄는 지역에 위치한 게 특징이다. 차를 파는 찻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생기는 찻집은 결이 다르다. 홍차를 중심으로 한 기존 찻집과 달리 접하기 어려운 질 좋은 녹차와 일본식 맛차, 중국의 보이차 등을 갖춰진 차 도구와 함께 낸다. 한마디로 매니어나 찾을 법한 본격적인 찻집인데, 요즘 이곳에 차 매니어가 아닌 커피와 카페에 탐닉하던 2030들이 방문한다.

매니어나 찾을 법한 본격적인 찻집에 카페와 커피에 홀릭하던 2030들이 발걸음을 한다. [사진 이이엄]

매니어나 찾을 법한 본격적인 찻집에 카페와 커피에 홀릭하던 2030들이 발걸음을 한다. [사진 이이엄]

옥인동 주택가 안쪽에 자리한 이이엄은 차를 오랫동안 공부한 주명희 대표가 지난해 10월 문을 연 공간이다. 민예품 전시관을 방불케 할 만큼 내공이 깃든 차 도구들과 수공예품이 곳곳에 자리한 이곳은 본래 차 매니어들을 위한 다회를 열고 차 도구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기획한 곳이었다. 매니어 등급의 섬세한 차를 내는 데다 가격도 한 잔에 1만5000원을 상회하지만 요즘 줄을 서서 입장할 만큼 인기다. 주 대표는 “이곳을 찾는 이들의 90%가 차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어서 놀란다”며 “계획과 달리 요즘에는 차를 내면서 차 도구 사용법과 음미 방법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고 했다.

청년들의 차 모임인 청년청담의 정기 찻자리. 14일 오후 서울 옥인동 북성재에서 약 20여명 남짓의 회원들이 모여 차를 마시고 있다. 장진영 기자

청년들의 차 모임인 청년청담의 정기 찻자리. 14일 오후 서울 옥인동 북성재에서 약 20여명 남짓의 회원들이 모여 차를 마시고 있다. 장진영 기자

청년들의 차 모임인 ‘청년청담’을 이끄는 김용재 대표는 “2015년에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지 않아 문제라는 심포지엄이 열렸을 정도였는데, 최근 1~2년 사이 차에 새롭게 관심을 갖는 젊은 층이 느는 것을 체감한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2016년부터 약 20여명 남짓의 차 애호가들이 모여 차를 마시고 공부하는 청년청담의 정기 모임은 요즘 인스타그램에 모임 일정을 올리면 금세 마감이 될 만큼 인기다.

힐링부터 취향 과시, 차의 매력

일단 차가 만들어내는 고즈넉한 시간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힐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의도적으로 배경음을 줄여 차를 따르는 물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찻집이 시끄러운 카페보다 더 어필하는 이유다.
옥인동 찻집 이이엄에선 핸드폰 촬영을 할 수 없다. 요즘처럼 카페 홍보에 SNS 사진이 중요한 때에 맞지 않는 전략이지만 오롯이 차 한 잔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주명희 대표의 의지가 확고하다. 덕분에 이이엄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한 호젓함을 느낄 수 있다. 말소리·발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이 공간에선 그야말로 순도 높은 힐링이 가능하다.

조용히 차를 음미할 수 있도록 꾸며진 옥인동 이이엄의 내부. 수공예 차 도구들이 눈길을 끈다. [사진 이이엄]

조용히 차를 음미할 수 있도록 꾸며진 옥인동 이이엄의 내부. 수공예 차 도구들이 눈길을 끈다. [사진 이이엄]

차에 대한 인식 변화도 한몫했다. 이전에는 맛을 즐기기 어렵고 접하기도 쉽지 않아 소수가 즐기는 고급 취미라는 인식이 컸다. 하지만 점차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 탐구하고 이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흔하지 않은 차 문화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었다. SNS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고급 차 문화가 SNS를 통해 퍼지면서 젊은층에선 한 번쯤 즐기고 싶은 문화로 떠올랐다. 푸드스타일리스트 메이씨는 “2~3년 전부터 건강한 이미지의 선명한 초록색 가루차 인증샷이 SNS에 뜨면서 차의 인기를 조금씩 실감했다”며 “3만원대 안에서 내 취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2000년대 초반 불었던 와인 붐과 비슷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시각적인 요소에 예민한 요즘 세대들에게 차 도구 등 다양한 공예품과 함께 즐기는 고급스러운 찻자리는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만족감을 준다.

이이엄 주명희 대표가 오랫 동안 모아온 차 도구들. 차 맛과 공예의 아름다움을 한 자리서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찻자리의 매력이다. [사진 이이엄]

이이엄 주명희 대표가 오랫 동안 모아온 차 도구들. 차 맛과 공예의 아름다움을 한 자리서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찻자리의 매력이다. [사진 이이엄]

커피와 와인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진 것도 차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레 북돋웠다. 청년청담 김용재 대표는 “흔히 커피 대신 차를 마신다는 식으로 커피와 차를 대척점에 두지만, 오히려 커피와 차는 함께 발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커피나 와인에 관해 관심 갖는 이들이 늘면서 자연스레 커피를 마실 수 없을 때 혹은 와인을 마실 수 없을 때, 차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청년청담 김용재 대표는 "커피와 와인의 대체재로서 차가 주목받고 있다"고 차의 인기 비결을 말했다. [사진 청년청담]

청년청담 김용재 대표는 "커피와 와인의 대체재로서 차가 주목받고 있다"고 차의 인기 비결을 말했다. [사진 청년청담]

콘텐트 풍부한 차, 즐길 거리 많다

차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건 단순한 먹방이 아닌 ‘먹학(學)’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치킨 덕후, 냉면 덕후 등 좋아하는 먹거리에 더 깊이, 더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요즘 트렌드에 걸맞은 새로운 콘텐트로 차가 주목받고 있다. 문화적 호기심이 풍부한 요즘 세대들에게 어려운 차는 오히려 집요하게 파고들고 싶은 대상이다. 혼자 차를 마시는 것에서 찻자리, 티 클래스 등으로 진화하며 발전하는 이유다.

지난 14일에 열린 청년청담의 찻자리. 여섯 가지 차를 마시며 향을 비교하는 것이 주제였다. 장진영 기자

지난 14일에 열린 청년청담의 찻자리. 여섯 가지 차를 마시며 향을 비교하는 것이 주제였다. 장진영 기자

지난 14일 열린 청년청담의 정기 찻자리 주제는 ‘차의 맛과 향’이었다. 다양한 맛과 향의 차 6종류를 놓고 비교해보는 제법 학구적인 자리였다. 오는 5월에는 차 그림(다화·茶畵)를 두고 차를 음미하는 행사를 기획 중이다. 지난해 150명이 모인 찻자리에선 청년 도예가들을 후원하는 찻그릇 전시가 함께 열렸다. 차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음악과 그림, 공예 등과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이다. 즉, 즐길 수 있는 콘텐트가 풍부하다. 청년청담의 김용재 대표는 “그림·문학 등과 자연스레 연계되는 차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품격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매개체”라고 했다.

차를 마시며 차와 관련된 그림, 음악, 문학 등을 함께 감상하기도 한다. 즐길 수 있는 콘텐트가 풍부하다는 점도 차가 젊은층에 확산하는 이유다. [사진 청년청담]

차를 마시며 차와 관련된 그림, 음악, 문학 등을 함께 감상하기도 한다. 즐길 수 있는 콘텐트가 풍부하다는 점도 차가 젊은층에 확산하는 이유다. [사진 청년청담]

물론 지금의 차에 대한 관심, 찻자리의 유행이 일종의 과시적 소비라는 의견도 있다. 맛차차 이예니 대표는 “아직은 차 문화가 일상까지 스며들었다기보다 트렌드적 소비에 머무르고 있는 느낌”이라고 지적하며 “유행이 빠르게 뜨고 지는 우리나라에서 차와 찻자리의 인기가 하나의 유행으로 스쳐 지나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은 “요즘 차 문화가 국적을 불문하고 지나치게 섞여 있는 것은 아쉽다"면서도 차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올라가는 지금이 우리의 좋은 차를 설득할 수 있는 좋은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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