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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뉴스]“임금 떼먹는 악덕업주 꼼짝마”…광주 고려인 돕는 수호천사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8일 법률상담을 위해 광주 고려인마을을 찾은 법률지원단 회원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노강규·강행옥 변호사, 통역을 맡은 김 엘레나씨, 신조아 고려인마을 대표, 정강희 노무사.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18일 법률상담을 위해 광주 고려인마을을 찾은 법률지원단 회원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노강규·강행옥 변호사, 통역을 맡은 김 엘레나씨, 신조아 고려인마을 대표, 정강희 노무사. 프리랜서 장정필

“고려인 지킴이 역할 다하겠다”

18일 오후 7시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 마을. 일과를 마친 고려인들이 진료소 건물 앞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매주 월요일 열리는 무료 법률상담을 받기 위해서다.

“고려인 돕자”며 변호사·노무사 17명 의기투합 #2017년 6월 발족…임금체불 등 594건 무료상담 #영주권 사기사건이 발단…월요일마다 북적 북적

고려인들은 이날 상담자인 노강규(56) 변호사에게 속사정을 털어놨다. 임금체불부터 범죄·상해·폭행·소송·비자 문제까지 다양했다. 김 세르게이(55·가명)씨는 “작업 중 팔을 다쳐 3개월째 일을 못 했는데 산업재해를 신청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며 “매일 식비와 방값 때문에 막막했는데 한시름을 놨다”고 말했다.

고려인 4000여 명이 모여 사는 광주 고려인 마을에는 수호 천사가 있다. 고려인 마을의 법률지원단 소속 변호사 13명과 노무사 4명 등 20여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2017년 8월부터 고려인들의 각종 소송과 범죄 피해 문제를 돕고 있다. 고려인들은 한국어가 서툰 데다 한국 국적을 얻지 못한 경우도 많아 각종 범죄에 취약하다.

지난 18일 광주 고려인마을의 무료 법률상담소를 찾은 고려인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18일 광주 고려인마을의 무료 법률상담소를 찾은 고려인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고려인, 구한말 러시아로 이주

고려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이주한 한인들이다. 1937년 스탈린 시절에는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하면서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다. 2000년대 이후 조부나 증조부 고향인 한국에 들어왔으나 여전히 경제·문화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곳 고려인 마을에서 법조인의 도움이 시작된 것은 2017년 5월. 고려인 3세인 리모(46·여)씨 등 3명이 브로커에게 속아 1450만원을 뜯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다. 재외 동포법상 고려인 3세까지만 영주권을 주고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분류하는 점을 노린 사기였다. 피해자들은 당시 “자녀들의 영주권을 주겠다”는 말에 속아 돈을 건넸다가 돌려받지 못했다.

이 소식이 광주 YMCA 시민권익변호인단에서 무료 변론 활동을 해온 강행옥(59) 변호사 귀에 들어갔다. 강 변호사는 곧바로 고려인 마을을 방문해 무료 소송을 해준 끝에 리씨 등의 돈을 찾아줬다. 고려인 마을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힌 강 변호사와 동료 변호사들이 의기투합하면서 법률지원단이 꾸려진 것이다.

러시아 이주 초기 고려인들의 모습. [사진 광주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러시아 이주 초기 고려인들의 모습. [사진 광주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임금체불에 영주권 사기 피해도  

법률지원단에는 단장인 강 변호사와 김경은(40), 김나윤(49·여), 김상훈(49), 김지현(45·여), 노강규(57), 송지현(59·여), 신광식(55), 윤춘주(52), 이민아(48·여), 정인기(48), 최형주(42·여), 홍지은(39·여) 변호사가 참여한다. 지원단 출범 후 정강희(55), 김사헌(34), 이진훈(51), 임미라(47·여) 노무사도 가세했다. 고려인들의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문제를 이들이 돕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말까지 총 594건의 무료지원을 해줬다. 임금체불 536건(90%)과 산재 17건(3%), 비자 문제 15건(3%), 기타 21건(4%) 등이다. 단장인 강 변호사는 “고려인 대부분이 변호사 선임료조차 대기 힘든 형편”이라며 “어렵게 사는 동포를 지켜주려는 사람이 많다는 걸 널리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인 마을은 국내 대표적 고려인 집단마을이다. 현재 한국에 있는 고려인 4만여명 가운데 10%가량이 광주 광산구 월곡·산정·우산동 일대에 살고 있다. 1만여명이 사는 경기도 안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광주 고려인마을의 고려인들이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광주 고려인마을의 고려인들이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한국말 서툴러 일자리 얻기 어려워

덕분에 이곳 고려인 마을에는 마을 종합지원센터와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청소년 문화센터 등이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나 중도입국한 자녀를 위한 다문화학교인 ‘새날 학교’와 협동조합도 고려인의 한국 생활을 돕고 있다.

신조야(64·여) 광주 고려인 마을 대표는 “무료 법률상담은 지난 1월 문을 연 진료소와 함께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며 “소송비까지 사비를 들여 도와주는 변호사·노무사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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