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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법원, 소상공인 위해 대형점포 막은 정부 이례적 비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인근 상인 피해를 이유로 대규모 유통점의 입점을 막는 '사업조정제도'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20일 중소벤처기업부(중기벤처부)와 서울 행정법원에 따르면 유진그룹 계열사인 EHC가 중기벤처부를 상대로 낸 서울 독산동에 DIY 인테리어 전문점인 '에이스 홈센터 서울 금천점(이하 홈센터)' 개점연기 권고처분 취소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EHC의 손을 들어주면서다.
재판을 맡은 서울 행정법원 제3부는 중기벤처부의 홈센터 개점연기 권고처분을 강하게 비난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국가의 개입도 어디까지나 국민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시장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인정되는 것”이라며 “유통시장에 대한 규제와 조정은 헌법이 보장하는 영업 및 기업의 자유와 조화를 이루는 한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무분별하게 중대형 소매점 개점을 장기간 금지할 경우 중대형 소매점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매출감소, 고용감소, 소비자의 후생감소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중기벤처부의 개점연기 권고처분이나 사업조정신청과 관련해 법원이 반대의 목소리를 낸 건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장 6년 간 못열게 된 유통점 측이 중기벤처부를 상대로 소송 

이번 사태의 발단은 EHC가 2017년 금천구 독산동에 DIY 인테리어 전문점인 홈센터를 개점하기로 하면서다. 하지만 인근 소상공인들로 구성된 시흥유통진흥사업조합(이하 유통조합)은 이에 반대하며 나섰다. "홈센터가 개점하면 중소상공인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홈센터는 2만여 종의 인테리어 관련 용품을 판매하는 데 이곳에서 약 2.6㎞ 가량 떨어진 곳에 시흥유통상가가 위치해 있다.

이후 EHC와 유통조합 측은 6차례에 걸쳐 자율조정회의를 열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당시 EHC는 조합에 ▶진열 공간을 축소하고 ▶조합 측이 판매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231개 브랜드 중 91개를 취급하지 않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

유진그룹 계열사인 EHC가 출점한 에이스 홈센터 서울 금천점의 외관. 사진 EHC

유진그룹 계열사인 EHC가 출점한 에이스 홈센터 서울 금천점의 외관. 사진 EHC

결국 중기벤처부는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난해 3월 사업조정심의회를 열고 "홈센터의 개점을 3년 간 연기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사업조정심의회는 자율조정이 결렬되면 열린다. 여기서 내려진 사업개시 연기결정은 1회에 한해 3년 더 연장할 수 있다. EHC로선 최장 6년간 점포를 열 길이 막히는 셈이었다. 이에 EHC는 중기벤처부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냈다.

 개점해보니 월 매출 3억인데, 조사한 피해액은 월 87억원? 

재판부는 개점 연기 결정이 된 근거가 부당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중소상인 예상 피해액의 근거인) 중기중앙회와 중소기업연구원의 조사결과는 그 내용이 부실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자료로 삼을 수 없는 데, 중기벤처부는 내용이 부실하여 신빙성이 없는 조사결과 만을 근거로 삼아 이 사건을 처분했다”고 밝혔다.

 유진그룹 계열사인 EHC가 출점한 에이스 홈센터 매장 내부. 이곳에선 2만여 종의 인테리어 관련 용품을 판매한다. 사진 EHC

유진그룹 계열사인 EHC가 출점한 에이스 홈센터 매장 내부. 이곳에선 2만여 종의 인테리어 관련 용품을 판매한다. 사진 EHC

실제 당시 중기중앙회는 매장 면적이 1795㎡인 홈센터 금천점이 개점할 경우 인근 상인들이 입을 피해 금액이 월 평균 87억5000만원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하지만 실제 개점해보니 홈센터 금천점의 월 평균 매출은 2억7000만원 선에 그쳤다. EHC는 이번 판결에 앞서 법원에 낸 ‘집행정지 신청’이 인용돼 지난해 하반기부터 홈센터 금천점을 운영해 왔다.

 유진그룹 계열사인 EHC가 출점한 에이스 홈센터 매장 내부. 이곳에선 2만여 종의 인테리어 관련 용품을 판매한다. 사진 EHC

유진그룹 계열사인 EHC가 출점한 에이스 홈센터 매장 내부. 이곳에선 2만여 종의 인테리어 관련 용품을 판매한다. 사진 EHC

이번 판결 뿐 아니라 사업조정 제도를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중소상공인 보호’라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선 무리하게 대기업이나 중견 기업의 영업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지난해 개점한 롯데몰 군산점이나 이마트 노브랜드 춘천점 등도 인근 상인들과 사업조정신청 문제로 갈등을 빚은 바 있다. 특히 일부 상인단체는 '상생기금'을 명목으로 무리한 수준의 보상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편 중기벤처부는 해명자료를 내고 "소상공인의 피해 영향, 실태조사 결과 및 사업조정심의의 적절성 등에 대해 여전히 법적 다툼이 있고 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절차가 진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이수기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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