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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게임 규제 이젠 그러려니…한국에선 숙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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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송재경 엑스엘 게임즈 대표 단독 인터뷰  

천재 게임 개발자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가 13일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네오위즈판교타워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천재 게임 개발자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가 13일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네오위즈판교타워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송재경은 (KAIST) 컴퓨터실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학기 초엔 아예 컴퓨터 관리자에 지원한다. 그는 전산실에 살다시피 했다. 송재경은 한국 최초의 24시간 PC방 알바였다.’


넥슨의 창업 과정을 다룬 책 『플레이』에 나오는 송재경(52) 엑스엘게임즈 대표에 대한 묘사다. 송 대표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 동기인 김정주 NXC대표와 함께 1994년 넥슨을 창업했다. 그곳에서 세계 최초 온라인 그래픽 게임 ‘바람의 나라’를 만들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퇴사했다.

리니지·바람의 나라 개발한 송재경 #“모두들 뒤에선 다 즐기면서도 #대놓고 하는 건 문제 삼는 풍토 #돈보다 탄성 부르는 게임이 목표”

1998년엔 서울대 전자공학과 85학번인 김택진이 세운 엔씨소프트에 합류해 ‘리니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사업 방향을 놓고 갈등을 빚다 2003년 회사를 나갔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게임 회사인 엑스엘게임즈를 세웠다.

그후 십 수년이 지나는 사이 송 대표가 만든 두 게임은 한국 IT산업의 부흥을 일궜다. '리니지M(리니지 모바일 버전)'은 아직도 초히트 게임이며, '바람의 나라:연(바람의 나라 IP를 이용한 모바일 게임)은 올해 출시 예정이다. 몸담았던 두 스타트업은 현재 대한민국 ITㆍ게임업계를 대표하는 거대 기업이 됐다. 그리고 천재 개발자로 불렸던 송 대표에겐 ‘한국의 워즈니악’이란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스티브 잡스와 함께 미국 애플을 창업해 기반을 다졌으나 이후 애플을 떠났던 스티브 워즈니악에 빗댄 별명이었다.

넥슨의 창업과정을 다룬 책 『플레이』에 나오는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왼쪽)와 김정주 NXC 대표를 그린 삽화 [사진 『플레이』]

넥슨의 창업과정을 다룬 책 『플레이』에 나오는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왼쪽)와 김정주 NXC 대표를 그린 삽화 [사진 『플레이』]

 넥슨의 창업과정을 다룬 책 『플레이』에 나오는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왼쪽)와 김정주 NXC 대표를 그린 삽화 [사진 『플레이』]

넥슨의 창업과정을 다룬 책 『플레이』에 나오는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왼쪽)와 김정주 NXC 대표를 그린 삽화 [사진 『플레이』]

 지난 13일 경기 성남 판교테크노밸리에 있는 엑스엘게임즈 본사에서 만난 송 대표는 ‘한국의 워즈니악’이라는 별명에 대해 “난 잠깐 운이 좋아서 반짝했던 것뿐인데, 그렇게 불러주면 완전 영광”이라며 웃었다. 코드 짜기에 몰두하던 중 인터뷰를 하러 나온 그는 슬리퍼를 신고 수염이 덥수룩한 상태였다. 피곤해 보였지만 눈만은 유난히 반짝거렸다. 송 대표가 일간지와 인터뷰를 한 건 수년 만에 처음이다. 그는 한국 게임산업에 대해 "돈 버는 게임에 안주하지 말고, 규제 탓하지 말고, 새로운 예술적 게임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니지, 바람의 나라를 만든 천재 개발자

어떻게 지내나.
“게임 개발 열심히 하고 있다. 지금 서비스 중인 게임 아키에이지와 새로 나올 다중 접속 역할 수행 게임(MMORPG)인 달빛조각사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요즘 내가 짜는 코드는 당장 시급한 프로그램은 아니고 게임 개발 툴 관련 코드다. 최근 5~6년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느라 코딩을 제대로 못 했는데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코딩을 하게 됐다. 이런 말 하면 꼰대 소리 듣겠지만 매주 월요일 아침 회사에 오는 게 설렌다.”
엑스엘게임즈의 게임아키에이지 속 한 장면 [사진 엑스엘게임즈]

엑스엘게임즈의 게임아키에이지 속 한 장면 [사진 엑스엘게임즈]

판교에 산다고 들었다.  
“회사가 판교로 옮기면서 나도 이사 왔다. 물가 비싼 것만 빼곤 다 좋다. 깨끗한 데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조용해지니 더 좋다.”
회사 홈피 ‘나는 게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앞으로 인공지능(AI)이 상당 부분 사람이 하는 일을 대체할 것이다. 수십 년 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남아 있을까 생각해 봤다. 그래도 게임은 사람만의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공지능은 굳이 즐거움을 위해 뭘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넣은 문구다.”

"개발은 잘해도 돈 버는 재주는 없다." 

김정주 NXC대표와 함께 창업했다.
“대학 1학년때 정주네 집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자주 갔는데 그때 한참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회사를 키우던 그런 때였다. 빌 게이츠처럼 우리도 뭘 해보자는 얘기를 많이 나눴다. 원래 게임을 좋아했던 터라 개발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여건이 맞지 않았다. 그러다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고 정주와 함께 창업했다. ”
창업 초기엔 어땠나.
“테헤란로에 있는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냈다. 당시가 일과 관련된 측면에서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집에 안 가고 오피스텔 2층 침대에서 자다 일어나 코딩하다 밥 먹고 다시 자고 그랬다. 바깥세상에서 돌아가는 시간과 무관하게 사무실 안의 시간은 따로 흘렀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금 생활 같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주가 시킨 건 아니다. (웃음) 내가 재밌고 좋아서 스스로 한 것이다.”
 천재 게임 개발자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가 13일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네오위즈 판교타워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천재 게임 개발자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가 13일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네오위즈 판교타워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리니지 20년간 인기, 마냥 좋은 일일까

엔씨소프트로 옮긴 뒤 만든 리니지가 20년째 흥행몰이 중이다.
“내가 터를 닦은 게임이라 오래 서비스 되는 게 좋기는 한데 마냥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뭔가 좀 게임도 발전해야 하는데, 20년 전 리니지가 아직도 톱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에 안주하는 느낌이다.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송 대표는 한국의 1세대 게임 개발자로서 초창기 돈도 상당히 벌었다. 2002년 한 증권정보분석 업체가 발표한 국내 50대 젊은 부호 명단에서 당당히 29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 명단에서 1위는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상무보였으며 김택진 대표가 3위였다. 하지만 엔씨소프트를 떠나 자신의 회사를 창업한 이후에는 적어도 사업적 측면에선 기존만큼의 성과를 내진 못 했다. 그는 "난 돈 버는 쪽에는 밝지 않은데 정주는 그쪽에 소질이 있었다. 개발자가 지녀야 할 능력과 부를 이루는 능력은 조금 다른 능력인 것 같다"고 말했다.

리니지 이후 '승자의 저주' 겪었다

리니지 이후 만든 게임들이 리니지만큼 흥행하진 못했다.
“‘승자의 저주’랄까. 리니지 개발할 때는 환경이 굉장히 열악했다. 개발팀도 적었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엔 훨씬 풍족한 상태에서 게임에 이것저것 다 집어 넣다 보니 뭔가 욕심이 생겨 잘 안된 게 아닌가 싶다.”

규제는 한국 개발자의 숙명

한국 IT업계의 산증인인 그는 미래 게임 산업에 대해 어떻게 전망할까. 수년 전 그는 한 외부 강연에서 “‘콘솔 게임’의 미래는 없다”고 말해 논쟁을 불러일으켰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전혀 아니다. 지금은 콘솔 게임의 장래가 밝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PC게임의 장래가 어두워지고 있다.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집에서 PC를 잘 사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거나 TV를 본다. 모바일 게임과 TV와 붙어있는 콘솔의 장래는 밝다.”
한국 게임은 비슷비슷하다는 지적이 많다.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처음 MMORPG가 나왔던 20년 전만 해도 여러 명이 하나의 게임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 굉장히 재밌었다. 그런데 요즘엔 거의 모든 게임을 다 통신망을 통해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다. 그렇다면 함께 즐기는 것 이외의 재미를 찾아야 하는데 지금 대부분의 게임사는 현재 돈을 버는 게임에만 집중하고 있다.”

예술성, 재미 다 갖춘 '갓 게임' 개발이 꿈 

규제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 개발자로서는 숙명이다. 우리에겐 ‘눈 가리고 아웅’하는 문화가 있다. 모두 다 뒤에선 즐기지만 대놓고 즐기는 것은 문제 삼는 그런 문화다. 25년간 게임 개발자로 산 터라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송 대표에게 개발자로서 남은 꿈은 무엇일까.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란 두 전설을 개발한 송 대표지만 놀랍게도 “‘갓 게임(예술성도 있고 재미도 있어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돈 버는 게임, 사용자 우려먹는 게임 말고 정말 누가 봐도 탄성을 자아내는 그런 예술적인 게임을 만들고 싶다”며 ‘돈 벌어서 예술을 한다고 욕을 먹더라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25년째 천재 개발자 소리를 들어온 그의 눈은 이 얘기를 할 때 가장 반짝거렸다.

판교=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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