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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9m 조각배로 지구 한 바퀴 반…Fed 입사 ‘스펙’ 됐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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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호 25면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한국인 첫 요트 세계 일주한 강동석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집채만한 크기로 덮쳐오는 파도를 견디며,
적도의 태양이 내리쬐는 바다 한가운데서
무풍지대를 만나 며칠째 표류하면서,
난 다짐했었다.
이번에 육지에 도착하면
다시는 바다에 나가지 않으리라.
이 지긋지긋한 바다를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육지 생활이 하루 이틀 지나면
또다시 나를 끌어당기는 바다의 유혹,
그렇게 바다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던
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 아마 난 바다에 미쳤나 보다.
<강동석 『그래, 나는 바다에 미쳤다』 중>

1994년 태평양·대서양 3년 반 사투 #사모아서 부친 사망 소식 듣고 좌절 #교민 모금 1만 달러 받고 다시 바다로 #2004년엔 직장 그만두고 북극 탐험 #겁없는 도전정신, Fed 면접 때 도움 #한번 뿐인 인생, 가슴 뛰는 일 해봐야

청년 강동석이 길이 30피트(약 9m) 폭 10피트(3m) 짜리 요트 ‘선구자 2호’에 몸을 싣고 LA 항을 떠난 건 스물다섯이었던 1994년 1월 14일이었다. 3년 5개월 뒤 강동석은 텁수룩한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덮은 모습으로 부산항에 도착, 지구 한 바퀴 반을 도는 단독 요트 세계일주를 완성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그는 미 중앙은행인 Fed(연방준비제도) 감사팀에서 14년째 일하고 있다. 매년 한 차례 고국을 찾아 모험과 도전정신을 일깨우는 그를 국제전화로 인터뷰했다.

모든 걸 혼자 해결, 외로움이 가장 힘들어

1994년 요트 세계 일주를 준비할 당시 강동석의 모습. [사진 강동석]

1994년 요트 세계 일주를 준비할 당시 강동석의 모습. [사진 강동석]

지금도 불쑥불쑥 떠나고 싶지 않나.
“가끔씩 그런 마음이 든다. 2005년 북극에 함께 갔던 분이 어제 전화를 했다. 그분은 회사 다니면서 남극과 히말라야도 갔다 오셨다. 나보고 남극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때 갔어야 했다. Fed 입사 면접 때도 ‘당신 마음이 동하면 또 나가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는 결혼 직후라 가정에 충실하고 오래 일할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다. 하하.”
Fed는 미국인도 들어가기 힘든 ‘꿈의 직장’인데.
“딜로이트 회계법인에서 근무하다가  고(故) 박영석 대장님 따라 북극점 탐험 가려고 퇴사했다. Fed는 구인광고 보고 지원했는데 인터뷰가 매우 까다로웠다. 잘 다니던 딜로이트 나와서 1년간 공백이 있는데 뭐 했냐고 물어서 북극 갔다 왔다고 하니 되게 좋아하더라. 요트 세계일주 한 경력도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요트 세계일주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거다. 바다 한가운데서 아프면 병원에도 못 가고, 그럴 때 정말 힘들고 외로웠다. 바다는 언제 표변할지 모르니까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1남1녀를 둔 중년이 됐는데, 아이들이 ‘나도 요트 세계일주 할래요’ 한다면?
“가족이 요트로 세계일주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딸은 뱃멀미를 심하게 해서 안 되고, 아들이 요트 세계일주 하겠다면 고민이 되고 걱정이 앞서겠지만, 아빠랑 일단 같이 한번 바다 나가보자고 하겠다.”
2005년 박영석 대장(왼쪽)과 북극점 탐험에 나선 강동석. [사진 강동석]

2005년 박영석 대장(왼쪽)과 북극점 탐험에 나선 강동석. [사진 강동석]

강동석은 부산 앞바다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뒤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 주유소에서 악착같이 일했다. 주유소 사장이 된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차례로 불러들였다. UCLA에 진학한 강동석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중고 요트를 사고, 수영·수구로 몸을 단련하며 항해술과 기상학도 배웠다. 1만3000㎞ 태평양 횡단에 나서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펄펄 뛰며 반대했지만 아들의 뜻을 꺾지 못했다. 떠나기 전날 밤, 아들의 방문을 연 아버지 손에는 구명조끼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요트 이름도 ‘코리아 빠삐용’에서 ‘선구자 호’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망망대해 속 식수가 바닥나 타는 갈증 속에 비가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강풍에 종이배처럼 흔들리다 쓴물까지 다 토해내는 등 갖은 고생 끝에 ‘선구자 호’는 LA에서 하와이를 거쳐 87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어느덧 중년이 된 강동석이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 강동석]

어느덧 중년이 된 강동석이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 강동석]

교환학생으로 연세대 사학과에서 공부하던 92년 5월, 강동석은 LA 흑인 폭동 소식을 들었다. 15년간 피와 땀으로 일군 아버지의 주유소도 잿더미가 됐다. 강동석은 실의와 분노에 잠긴 한인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며 요트 세계일주에 도전했다. 94년 1월 14일 LA 항, 아버지는 작은 보트로 ‘선구자 2호’를 쫓아오며 목이 터져라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4월 16일 사모아에 도착한 강동석은 비보를 듣는다. 흑인 폭동 이후 빚독촉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내가 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헛된 영웅심에 눈먼 이기주의자’ 한없이 자책하며 주저앉았다. 술로 지새던 그에게 ‘LA 강동석후원회’를 만든 신남철 씨가 찾아왔다. 그는 교민들이 모금한 1만 달러를 건네주며 “어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1997년 6월 8일, LA 항을 떠난 지 3년 5개월 만에 선구자 2호는 부산항에 몸을 풀었다. 7만㎞를 달려온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요트 이름 ‘선구자 호’ 아버지가 지어줘

강동석은 “요즘 젊은이들은 모험과 도전보다 현실에 안주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싶어한다. 사는 게 워낙 힘드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에 도전해 보는 게 젊은이의 특권 아닌가”라고 말했다. 강동석은 5월 말 국내에 들어와 학교와 기업체 등에서 특강을 할 예정이다. 그는 “전에는 숫기가 없어 대중 앞에 잘 나서지 않았다. 지금은 가능한 많은 분들을 만나 꿈을 갖고 도전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했다. 강동석의 강의를 듣고 싶은 분은 국내 후견인인 배성한 씨에게 연락하면 된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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