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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줄다리기 2년 만에 나빠진 경제…런던이 갈라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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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호 06면

[SPECIAL REPORT] 혼수상태 브렉시트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를 죽이고 있다고 묘사한 조형물이 지난 4일(현지시간) 독일 뒤셀도르프 전통 카니발 로즈 먼데이 퍼레이드에 등장했다. [AP=연합뉴스]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를 죽이고 있다고 묘사한 조형물이 지난 4일(현지시간) 독일 뒤셀도르프 전통 카니발 로즈 먼데이 퍼레이드에 등장했다. [AP=연합뉴스]

수에즈 운하 사태가 벌어진 1956년에 나는 태어났다. 영국이 프랑스·이스라엘과 힘을 합쳐 수에즈 운하 관리권을 이집트에서 강제로 빼앗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집트가 아니라 미국 때문이다. 영국이 더는 초강대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일은 영국인, 특히 노인들에겐 수치와 충격이었다.

에버라드 전 대사가 본 영국 표정 #언론도 의회도 공론화하기 꺼려 #‘방 안의 코끼리’에 가로막힌 셈 #메이는 격렬하게 부인하겠지만 #브렉시트 철회 선언 나올 수도

지금 영국인들은 비슷한 순간을 겪고 있다. 나는 보수 정치인들과 함께 저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직후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주권을 외국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EU의 관료들이 영국을 억압하고 있다고 느꼈다. 영국이 내는 EU 분담금을 낭비라고 봤다. EU 바깥에서 자유롭게 무역하는 영국의 밝은 미래를 그렸다.

국민투표 이후 2년여 기간 사이에 그들의 미소는 사라졌다. 영국 정부가 EU와 오랜 기간 밀고 당겨 얻어낸 합의안은 이득을 거의 가져다주지 않았다. 영국의 국제적인 지위는 EU에 남아 있었을 때보다 나빠질 판이다. 일부 보수 정치인들이 생각했던 멋진 자유무역협정(FTA) 등도 성사되지 않았다. 기업들은 영국을 떠나고 있다. EU 출신 의사와 간호사들을 더는 고용하기 어려워 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정도다.

상황이 이쯤 되자 19세기에 종교적인 믿음이 과학적인 발견 때문에 심각하게 도전받으며 일어난 ‘신앙의 위기(Crisis of Faith)’가 연상된다. 종교만큼이나 영국인 뇌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던 믿음인 자유무역과 독립적인 영국이라는 환상이 깨지고 있다는 얘기다. 현대의 무역은 과거처럼 영웅적인 개인에 의존하지 않는다. 복잡하고 신중한 협상으로 세워진 무역 질서를 바탕으로 한다. 영국처럼 중간 크기 국가가 홀로 협상하면 EU를 통해 다른 경제권과 협상해 얻어낼 수 있는 교역조건보다 나쁘고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치러야 하기 십상이다.

요즘 평범한 영국인들의 심사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대다수가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런던에 주로 사는 내 친구들은 브렉시트 지지자들의 혼란을 고소해 하기도 한다. 반대로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국민투표 당시 우호적이었던 여론이 돌아서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여론의 반전을 배신이라고 생각하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어제 시장에서 과일을 사는데 상인이 한국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진한 런던 사투리로 “총리가 (EU와 협상 등에서) 너무 나약해 화가 난다”고 말을 건넸다. 나는 영국 총리 혼자 EU의 다른 회원국 정상 27명을 상대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또 그들이 대부분의 카드를 가지고 있어 총리가 강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영국인들이 고통받는다는 점도 말해줬다.

하지만 상인은 “EU가 늘 영국에 이래라저래라 지시했다”며 “그래서 우리가 나가길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그녀가 팔고 있는 프랑스산 사과를 가리키며 영국이 EU를 떠난다면 가격이 오르고, 그만큼 사업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을 알려줬다. 상인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사과와 나를 번갈아 봤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번 주 의회가 잇따라 표결을 벌였다. 표결 결과 영국이 EU를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점점 커졌다. 그래도 영국이 EU를 떠나게 된다면, 27개국과 합의로 이별하든지 아니면 합의 없이 갈라서는 길(노딜 브렉시트)밖에 없다. 의회는 브렉시트 연기를 추진하기로 했다. EU 다른 회원국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이달 29일 EU를 떠나게 된다.

그런데 앞서 EU 쪽 사람들은 믿을 만한 계획 없이는 어떠한 연장도 없을 거라고 말했다. 영국 의회는 이른 시간에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더 나은 합의안? 어쨌든 의회는 나름 최선의 브렉시트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총리가 지적했듯이, 브렉시트 개시의 연장을 요구하더라도 다른 EU 국가들이 동의할지도 불확실하다. 그들이 연기에 동의하는 대가로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유럽의회 선거도 중요한 분수령이다. 영국이 EU에 남는다면, 5월 24일 즈음에 치러질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새로운 유럽의회는 7월 1일에 시작된다. 영국이 6월 30일 브렉시트를 개시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영국 출신 유럽의원이 의석에 앉지 못할 선거에 굳이 참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반면 7월 이후에 브렉시트를 개시한다면 영국은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 영국 유권자들은 유럽의회 선거를 두 번째 총선거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쪽이, 아니면 반대하는 쪽이 더 많이 당선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브렉시트 개시 일정을 미정인 상태로 둘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방 안의 코끼리(an elephant in the room)’가 있다. 의회나 언론 모두 공론화하기 꺼리는 난제가 있다는 얘기다. 앞서 말했듯이 영국이 3월 29일 브렉시트 개시일을 확실하게 연장하기 위해서는 영국을 뺀 EU 27개 회원국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영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브렉시트를 시작하겠다고 제출한 서한을 일방적으로 철회하는 방식으로 브렉시트 절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이때 EU 27개 회원국 동의를 받을 필요는 없다.

이제 디데이(D-day)인 3월 29일까지는 보름 정도 남았다. 의회는 사실상 떠나지 않겠다고 표결한 셈이지만 이를 공식화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지연 작전을 펼 것이다. 총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갈수록 꼬여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브렉시트 선언을 철회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28일 선언할 수도 있다. 물론 메이 총리는 이런 예측을 격렬하게 부인하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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