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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그날 청와대 회의는 열렸어야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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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김정은 수석 대변인’이란 말이 여당과 청와대의 심기를 뒤틀었지만, 대통령의 체면을 구겨놓은 일이라면 며칠 전 이미 있었다. 7일 청와대에서 열려다 무산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2차 본위원회 이야기다. 위원 중 여성·청년·비정규직 대표 3명의 불참으로 행사는 전날 밤 부랴부랴 취소됐다. 대통령 참석 행사가 이런 식의 파행을 빚은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어렵게 타결된 탄력근로제 합의안을 의결하면서 ‘사회적 대타협’ 성과를 홍보하려던 청와대 계획도 틀어져 버렸다. 경사노위는 나흘 뒤 다시 본위원회를 열었지만, 3명의 대표는 이번엔 행사 6분 전 문자로 불참을 통보했다.

노동계 어깃장으로 경사노위 파행 #정부가 끌려가면 대타협은 어렵다

나는 그날 청와대 행사를 예정대로 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사장 내 빈 의자는 사회적 대타협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침묵으로 웅변했을 것이다. 빈자리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고뇌에 찬 표정은 웃음기 띤 의결보다 훨씬 강렬한 메시지가 됐을 것이다. 행사 파행에 민주노총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정황은 여기저기 있다. 회의 강행은 노동계의 이기주의에 더는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정부 의지를 극적으로 보여줄 기회였다. 성과 없이 끝내는 회의도 때로는 좋은 전략이다. 하노이 회담장을 걸어나간 트럼프도 미국 조야에서 박수받고 있지 않은가.

정부는 사회적 대화를 통한 대타협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진행되는 모양새를 보면 회의감이 앞선다. 탄력근로제 확대는 지난해 말 이미 여야가 국회 처리를 합의했던 사안이다. 대통령 의중에 따라 경사노위에서 대타협 모양새를 갖추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평일 출퇴근 2시간씩 허용’이라는 어정쩡한 결론이 나온 자가용 카풀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정부와 여당은 대타협을 통한 아름다운 상생 모델이라고 찬사를 보내지만, 정작 이용자인 시민들은 시큰둥하다. 협상 당사자였던 카풀사업자와 택시업계 내부에서도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갈등을 타협으로 풀겠다는 뜻은 거룩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선의에만 기대는 대화는 불임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흔히 사회적 대타협의 전범(典範)으로 꼽는 1982년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만 봐도 그렇다. 바세나르 협약의 배경은 ‘네덜란드 병’으로 요약되는 심각한 경제 위기다. 그러나 중요한 성공 요인 중 하나는 ‘강제’에 가까운 정부의 압박이었다. 그해 집권한 기민당의 루드 루버스 총리는 노조에는 임금 동결, 사용자측에는 근로시간 단축을 촉구했다. 노사가 미적대자 “정부가 나서야 할 때”라고 선언하며 공무원 임금과 최저임금, 사회보장 동결을 담은 법안을 마련했다. 노동총연맹과 사용자협회 간에 극적 타결이 이뤄진 것은 그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기 며칠 전이었다.

대타협을 위한 지금 우리 사회 여건은 1982년 네덜란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는 약하고, 정부 신뢰도는 낮다. 무엇보다 다른 것은 노동계 내부 상황이다. 바세나르 협약서에는 노동총연맹과 사용자협회 외에도 여러 단체의 명단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두 상급 단체의 대표성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 노총이 갈라서 있고, 특히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각 계파의 목소리가 어지러운 우리와는 비교된다. 효율성보다는 모양새에 집착해 여러 단체를 참여시킨 경사노위 논의 구조도 문제다.

이럴수록 중요한 것이 정부의 책임과 역할인데, 정작 우리 정부는 태평이다. 경사노위의 청와대 회의가 무산되자 청와대는 “대단히 안타깝다”는 부대변인의 의례적 입장 표명에 그쳤다. 노동계가 마음 돌리기만을 기다리는 듯하다. 사회적 대타협의 배경은 언제나 경제위기였다. 결국 위기가 더 깊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는 건가.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