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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의 어쩌다 투자]벌집계좌 거래소는 퇴출...특금법 개정안 통과 코앞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암호화폐 거래소가 앞으로는 ‘벌집계좌’를 사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벌집계좌는 거래소 법인계좌 아래 여러 명의 거래자 개인계좌를 두는 방식입니다. 지난해 초,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가 실시된 이후 은행들은 더 이상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일명 가상계좌)'를 거래소에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궁하면 통하는 건가요? 중소형 거래소는 벌집계좌라는 꼼수를 통해 운영을 계속해 왔습니다. 하지만, 벌집계좌를 통한 거래는 투자자 보호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금융당국이 벌집계좌를 단속하지 못했던 건 관련법이 없어서입니다. 조만간, 관련법이 제정된다고 하네요.

출처: 포춘

출처: 포춘

금융당국이 거래소에 철퇴? 아니, 갑자기 왜?
‘현재 정부 측에서 은행연합회를 통해 거래소 벌집계좌를 회수하고 있어 기업은행의 요청에 따라 기업은행 계좌를 금일 내 해지합니다’.
13일 오전 10시 38분, 암호화폐 거래소 나인빗이 이런 내용의 공지를 띄웠습니다. 이어 이날 오후에는 ‘[긴급]금융당국이 거래소에 대해 대대적인 철퇴를 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는 내용의 글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돌았습니다.
왜 이런 얘기가 나온 걸까요. 현재 국회에는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금법) 개정안’이 상정돼 있습니다. 지금은 거래소에서 자금세탁방지 관련한 사고가 터지면 그 책임을 거래소가 아닌, 거래소에 계좌를 발급해준 은행이 져야 합니다. 개정안에는 사고 책임을 거래소가 직접 지도록 바꿨습니다. 또, 벌집계좌의 금지를 명시했습니다. 벌집계좌를 쓰는 것으로 판단되면 은행이 자체적으로 계좌를 회수할 수 있습니다.
개정안이 국회 상정된 건 지난해 7월입니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죠. 그런데 왜 이런 말이 돌았을까요? 최근 금융당국이 법안 통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랍니다. 정부가 보여주기식으로 개정안을 추진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로 통과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게 입증된 거죠.

출처: 나인빗

출처: 나인빗

특금법 개정안 생기면 벌집계좌 단속 가능
그간 벌집계좌는 온갖 투자자 피해의 온상이 됐습니다. 벌집계좌로 들어간 돈은 법적으로 고객의 돈이 아니라 거래소 돈입니다. 은행의 관리ㆍ감독도 받지 않습니다. 고객이 거래소 계좌에 있는 돈을 출금하고 싶어도 거래소가 안 해주면 방법이 없습니다. 무슨 기준인지 하루 출금액을 제한하는 곳도 있습니다. 암호화폐 커뮤니티에는 “내 돈인데 사무실 찾아가 사정해서 받아왔다”는 등의 하소연이 넘쳐납니다. 게다가 벌집계좌를 쓰는 중소형 거래소 대부분이 덤핑과 펌핑을 통해 시세를 조작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불법이 판을 치는데, 금융당국은 뭐하고 있었냐고요? 손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법원의 판결입니다. 한 거래소가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무슨 근거로 법인계좌를 마음대로 뻇어 가느냐 하고요. 은행은 금융당국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벌집계좌를 회수한 겁니다. 법원은 그런데, 거래소 손을 들어줬습니다. 가이드라인은 법이 아니기 때문에, 벌집계좌를 회수할 만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앞으로 관련법이 생기면 금융당국이 벌집계좌 단속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시장 정상화를 위해선 좋은 거 아니야?
건전한 투자문화를 응원하는 모든 이들이 투자자 보호 장치가 미비한 거래소는 시장에서 퇴출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다만, 이때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은행들이 거래소에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 이른바 실명확인 가상계좌를 제공해야 합니다.
현재 실명확인 가상계좌를 발급받은 거래소는 빗썸ㆍ업비트ㆍ코인원ㆍ코빗 등 4곳에 불과합니다. 금융당국의 규제가 나오기 전에 이미 발급받은 곳입니다. 이후에는 어떤 거래소도 가상계좌 발급을 못 받았습니다. 곧, 가상계좌 발급은 안 해주고, 벌집계좌도 안 된다고 막았다가 지난해 10월 법원 판결로 벌집계좌를 금지할 수 없게 된 거죠.
그런데 만약 지금처럼 은행들이 가상계좌 발급을 안 해주면 어떨까요? 벌집계좌도 막힌 마당에 중소형 거래소는 원화 거래를 지원할 길이 없습니다. 비트코인(BTC)마켓, 이더리움(ETH)마켓 등으로만 운영해야 하는데, 이걸로는 장사가 안 되죠. 결국 4개 거래소만 겨우 살아남게 됩니다. 또, 이들 거래소에 신규 발급을 안 해주면(현재 업비트 상황입니다), 과거 계좌를 열었던 투자자를 빼고는 암호화폐에 투자하고 싶어도 투자할 길이 막히는 셈입니다. 이것이 진정 금융당국이 원하는 “질서있는 퇴장”의 수순일까요?

자금세탁방지 의무는 거래소가...“가상계좌 발급 쉬워질 것”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당국은 한 번도 은행 쪽에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를 제공하지 말라고 압박한 적 없다"고 합니다. 정말 금융당국의 그 어떤 발표나 통화에서도 은행을 압박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번 나인빗의 회수에도 금융당국의 개입은 없습니다. 우연히, 은행연합회라는 민간 기구를 통해, 제일 먼저 정부 은행인 기업은행이 행동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거래소 측의 설명은 다릅니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은행에서는 정부가 해 주지 말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들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앞서 말한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이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를 거래소에 제공하지 않는 것은 실은 자금세탁방지 이슈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거래소를 통해서 자금세탁이 이뤄져 북한으로 돈이 넘어간 경우 그 책임은 거래소가 아닌 은행이 집니다. 미국의 제제 대상 리스트에 올라가면 은행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타격이 큽니다.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퇴출되는 셈이죠. 암호화폐 거래소와 거래해서 ‘푼돈’ 버느니, 아예 리스크는 지지 않겠다는 게 은행의 입장이라는 거죠.
특금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거래소가 집니다. 은행이 아니라.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은 자금세탁방지 의무에서 자유로워지니 앞으로는 은행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특금법 개정안을 계기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거래소는 정리가 됐으면 합니다.
그런데 정말, 금융당국이 은행에 가상계좌 발급을 중단하라고 압박한 건 아닐까요?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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