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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희수의 공존의 문명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와 ‘콘비벤시아 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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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고려 태조 왕건이 수도 개경을 축성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때,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압둘 라흐만 3세(929~961)가 이슬람 칼리프국가를 창건하며 코르도바를 수도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세계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10세기 코르도바는 콘스탄티노플·바그다드·카이로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메트로폴리탄이었다. 인구 50만명의 이 도시는 유럽과 아프리카,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피혁과 직물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공존 정신으로 번영했던 코르도바 #유럽 르네상스 이끈 원동력 된 도시 #무슬림 등 박해·추방하며 추락 #폐쇄 정책으로 쇠퇴 … 역사의 교훈

정치적 안정과 물질적 풍요는 학문과 문화 수요를 창출하며 전 세계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80개 이상의 도서관이 보유한 40만권의 장서와 600개 이상의 모스크가 종교와 학문의 전당으로 지식 생태계를 견인했다.

번영의 원동력은 콘비벤시아(Convivencia·공존)였다. 기독교인·유대인· 무슬림·베르베르인들은 출신과 종교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잊혀지고 버림받았던 그리스 학문이 아랍어로 고스란히 되살아났고, 축적된 지식은 톨레도 번역소에서 라틴어로 재번역되어 유럽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단단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기 콘비벤시아를 상징하는 건축이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꼽힌다. 메스키타에서 모스크란 용어가 유래되었다. 784년 후우마이야 이슬람 왕조의 압둘 라흐만 1세가 처음 짓기 시작해 200년 동안 적어도 네 차례의 증축과정을 거쳐 완공된 불멸의 금자탑이다. 1236년 가톨릭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스크 내부를 일부 개조하여 산타 마리아 대주교좌 성당으로 개칭되었다.

스페인 남부 도시 코르도바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메스키타. 지금도 관광객이 줄을 잇는다. 코르도바는 10세기 크게 번성했던 도시다. [사진 이희수]

스페인 남부 도시 코르도바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메스키타. 지금도 관광객이 줄을 잇는다. 코르도바는 10세기 크게 번성했던 도시다. [사진 이희수]

메스키타의 규모는 예배 수용인원만 2만5000명이라 하니 웬만한 도시 하나를 품고 있는 셈이다. 856개의 다양한 재질의 열주가 만들어내는 일사분란한 좌우대칭의 기하학적 장엄함은 대추야자가 줄지어 선 시리아의 오아시스를 재현해 놓았다. 적색과 백색 대리석을 순치시켜 미학적 조화를 이룬 이중 아치와 이슬람의 예배 방향인 메카를 표시한 현란한 미흐랍 디자인에 이르러 메스키타 예술은 정점에 이른다. 종파를 초월한 장인 수천 명이 로마·비잔틴·이슬람·고딕·기독교 건축이라는 시대정신과 예술성을 총동원하여 함께 이룬 융합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메스키타의 가장 특징적인 구조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히는 수직적 질서가 아니라 민주적 수평성, 공간적 단순성을 강조함으로써 예배보러 오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신을 알현하는 영성의 자유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특히 메스키타 건설 과정에서 실명제를 실시했는데, 지금도 각 기둥에 새겨진 시공자 이름이나 서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책임 시공제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메스키타는 452년간은 모스크로, 783년간은 성당으로 두 개의 종교와 몇겹의 사연이 한 공간에서 공존해 왔다. 그러나 일요 미사가 집전 중인 채플 옆에서 한 아랍 방문객은 이슬람식 예배를 드리려다 안전 관리인에게 정중하게 거절당한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심경을 토로한다. 자신의 위대한 조상들이 이룬 신성한 공간에서 신께 예배를 드리려는 원초적 요구마저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 통탄한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몫이고, 정복자의 의례만이 유효한가 보다.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 남부에 뿌리를 내린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의 우마이야 왕조 패망(750년) 이후 다마스쿠스를 탈출한 왕자 압둘 라흐만 1세가 755년 극적으로 코르도바에 당도함으로써 새로운 도약 시대를 맞았다. 결국 코르도바는 1236년 페르디난드 3세에게 정복되었지만,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는 1492년까지 알함브라 궁전을 지키면서 이슬람 문화의 영예를 이어갔다. 이 시기를 안달루시아 문명 시대라 한다. 그러나 이교도 척결과 기독교 부활이라는 신성한 사명감으로 불탄 ‘레콩키스타(재정복)’는 잔혹한 학살과 추방으로 이어졌다. 800년 가까이 실험했던 콘비벤시아 정신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식체계의 핵심을 이루던 유대인들과 무어인으로 불리던 이슬람인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기독교로 개종하여 이등 시민이 되든지 아니면 추방이나 학살이었다. 신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다. 상당수 무슬림들은 모로코나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들을 받아준 곳은 모로코의 알모라비드 왕국과 이스탄불의 오스만 제국이었다. 안달루시아의 두뇌집단들이 대거 이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문명의 중심은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로 옮겨왔다. 지금도 모로코에는 유대인 공동체(게토)가 남아있다. 페즈·마라케시·메크네스 등 모로코 주요 도시에는 ‘멜라’라고 불리는 유대인 게토가 형성되어 모로코 시장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다른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반대하고 극단적으로 대립할 때도 모로코는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승인한 아랍국가도 당연히 모로코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가 군사적 충돌국면으로 치달을 때마다 모로코가 항상 중재에 나서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인재들을 추방하는 폐쇄 정책은 코르도바를 쇠퇴의 길로 이끌었다. 18세기에는 2만의 초라한 읍락으로 추락했다. 대성당으로 탈바꿈한 메스키타가 그나마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이를 찾아오는 관광객이 오늘날 코르도바를 먹여 살리는 자산이다. 콘비벤시아가 문화적 편가르기 보다 훨씬 큰 공감으로 인류문명에 공헌한다는 절대 법칙을 코르도바의 메스키타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