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농장 찾아오는 녀석들···사람 목숨도 위협한다

중앙일보

입력 2019.03.12 06:00

업데이트 2019.03.12 08:37

5일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한 사과 농장. 완만한 경사의 산비탈을 따라 사과나무들이 빼곡히 줄과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언뜻 보기엔 이파리 한장 피지 않은 앙상한 모습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가지 끝마다 작은 꽃눈이 솟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될 꽃눈이다.

농장주 "최근 사슴 개체수 늘어나 사과나무 3분의1 피해"
사과 꽃순 먹어치우고 급기야 사람 공격해 사망 이르게해
올 1월엔 경북에서 멧돼지에 공격당한 주민 숨지기도
2011~2016년 야생동물 피해액 연평균 330억5500만원

2만㎡에 걸친 농장에서 나무 가지가지마다 꽃눈이 피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농장주 이근득(62)씨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지난 겨울부터 인근 야산에서 붉은사슴들이 떼로 몰려와 꽃눈을 대부분 뜯어먹어서다. 실제 사과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른 키 높이보다 밑에 핀 꽃눈들은 다 뜯겨나간 상태였다.

5일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한 사과 농장 나무에 핀 꽃눈(왼쪽). 야산에서 내려온 붉은사슴들이 이 꽃눈을 먹어치우는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은 꽃눈이 뜯겨나간 흔적. 성주=김정석기자

5일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한 사과 농장 나무에 핀 꽃눈(왼쪽). 야산에서 내려온 붉은사슴들이 이 꽃눈을 먹어치우는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은 꽃눈이 뜯겨나간 흔적. 성주=김정석기자

이씨는 "밤만 되면 인근 까치산(해발 449.5m)에 서식하는 붉은사슴들이 건너와 꽃눈을 먹어치운다. 꽃눈 하나는 곧 사과 한 알이다. 최근 사슴 개체 수가 크게 늘어 사과 농장 3분의 1이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이씨가 사과 농장을 거닐며 피해 상황을 살피는 주변으로 사슴이 남기고 간 배설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붉은사슴(Red Deer)은 어깨높이 1~1.2m, 몸무게 110~160㎏에 달하는 사슴류다. 유럽에서 '엘크(Elk)'라고 부르는 말코손바닥사슴보다는 작지만, 동물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사슴(일본사슴)보다는 크다. 수컷은 80~120㎝ 길이의 뿔을 갖고 있다.

붉은사슴. [사진 서울대공원]

붉은사슴. [사진 서울대공원]

지난해 12월 18일 경북 성주군 수륜면 한 사과 농장에 내려와 나무에 핀 꽃눈을 먹어치우고 있는 붉은사슴들. [사진 독자]

지난해 12월 18일 경북 성주군 수륜면 한 사과 농장에 내려와 나무에 핀 꽃눈을 먹어치우고 있는 붉은사슴들. [사진 독자]

최근 붉은사슴들이 수륜리 일대 사과 농장 10여 곳(총 15만㎡)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이씨는 "80~90년대 운영했던 사슴농장에서 탈출하거나 버려진 사슴들이 야생에서 번식해 개체 수가 크게 늘었다"며 "겨울철엔 과수나무의 꽃눈을, 봄·여름철엔 논에 심어둔 모를 먹어치운다"고 전했다.

급증한 야생동물들이 농민들의 안전뿐 아니라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먹이가 부족한 겨울~초봄에 특히 심하다. 야산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한 야생동물들이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것도 모자라 농가와 도심까지 내려와 다양한 해를 끼친다. 갑자기 도로에 뛰어들어 교통사고를 유발하고 가축을 물어 죽이거나 인명까지 해치는 경우도 있다.

지난 1월 23일 경북 예천군 예천읍 석정리에서 60대 주민이 멧돼지에 물려 숨진 일이 대표적이다. 노모(65)씨는 이날 오후 7시쯤 고추 지주목을 구하러 뒷산에 갔다가 멧돼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노씨는 몸 여러 군데 멧돼지에게 물린 상처가 있었다.

지난해 4월 17일 오전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 묘역에 멧돼지 한 마리가 튀어나와 묘역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4월 17일 오전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 묘역에 멧돼지 한 마리가 튀어나와 묘역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지난해 11월 10일에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한 야산에서 주민 A씨(69)가 멧돼지에 물려 다쳤다. A씨는 종아리 등을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멧돼지는 A씨를 공격한 후 산속으로 달아났다.

멧돼지나 사슴류뿐 아니라 유기견이 야생화한 들개, 까치·까마귀 같은 조류가 농작물, 전력시설, 양식장 등에 해를 입히기도 한다. 경기도 안산시에는 최근 갑자기 까마귀떼 3000여 마리가 출몰해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까마귀떼는 주로 이웃 지자체인 수원시에서 목격됐었다. 까마귀떼가 전깃줄에 앉아 있어 아래에 주차해 둔 차량은 새 배설물로 범벅이 됐고, 인도도 '분변 밭'으로 변했다. 정전 사고나 질병 전파 우려도 나왔다.

야생동물이 끼치는 피해는 매년 전국적으로 300억원 안팎에 이른다. 2017년 환경부가 공개한 2011~2016년 유해야생동물 피해 현황에 따르면, 6년간 농작물·양식장·항공기·전력시설 등에서 입은 연평균 피해액이 330억5500만원에 달했다. 동물별로는 멧돼지가 가장 많이 해를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고 고라니와 까치, 오리, 꿩 순으로 뒤를 이었다.

1월 30일 경북 포항시 남구청 유해야생동물기동포획단이 최근 대이동과 효곡동 등지에 출몰한 야생멧돼지를 포획하기 위해 출동을 준비하고 있다. [뉴스1]

1월 30일 경북 포항시 남구청 유해야생동물기동포획단이 최근 대이동과 효곡동 등지에 출몰한 야생멧돼지를 포획하기 위해 출동을 준비하고 있다. [뉴스1]

포획된 야생동물 수는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멧돼지의 경우 2011년 1만4479마리에서 매년 수가 늘어나 2016년 한 해에만 3만3317마리가 포획됐다. 고라니는 2011년 1만9379마리가 포획된 반면 2016년엔 이보다 6배가량 많은 11만3763마리가 잡혔다.

성주·안산=김정석·심석용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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