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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교과서 속 근현대사, 일상 속으로 스며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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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미래의 나침반

국사 교과서의 맨 뒷부분. 바로 근현대사다. 단지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목적으로만 국사 과목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유독 근현대사에 취약하다는 데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올 들어 근현대사가 세대를 막론하고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막연하게만 느껴진 100년 전 이야기가 마치 엊그제 겪은 것 같은 생생한 현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가깝지만 체감상 멀게만 느껴진 근현대사가 방송·여행 등을 통해 일상에 스며들며 선명한 역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애국심 고취하는 TV프로·영화 #유적지 탐방 여행 잇따라 선봬 #선조의 뜻 기리는 패션·앱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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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유세연(42·경기도 안양동)씨는 올해 1월 영화 ‘말모이’를 보고 난 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유씨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지난달 역사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덕수궁을 야간에 관람하는 ‘밤도깨비 투어’를 다녀왔다. 덕수궁 곳곳에 숨어 있는 고종 황제 시절의 역사적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일주일 뒤 유씨는 서울 종로의 개화기 의상 전문점에서 옷을 빌려 입고 덕수궁을 다시 찾았다. 유씨는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없었던 이야기를 알게 돼 역사에 빠지게 됐다”며 “1900년대 초 의상을 입고 덕수궁 석조전에 서 있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기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개화기, 일제 강점기 생생히 재현

근현대사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은 지난해 7~9월 방영한 tvN의 ‘미스터 선샤인’이 시동을 걸었다. 이 드라마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군함에 승선했다가 미국까지 가게 된 한 조선인이 미국 군인이 돼서 돌아와 조선에 주둔하며 벌어진 가상의 일을 그렸다. 최고 시청률이 18.1%(닐슨코리아 집계)까지 올랐다. ‘미스터 선샤인’의 인기는 개화기의 패션 아이템을 유행시키는 데도 한몫했다.

개화기는 구한말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이후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종래의 봉건적인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바뀌어가던 시기다. 3월 6일 현재 인스타그램엔 ‘개화기’란 표제어로 해시태그한 게시글만 11만7000개를 넘었고 ‘경성 의복’(13만1000개), ‘개화기 의상’(4270개), ‘개화기 콘셉트’(5614개) 등 개화기를 아이템으로 삼아 찍은 사진이 줄줄이 게시됐다. 사진은 개화기 무렵 우리나라에 들어온 망사 베레모 같은 서양식 모자나 양산·장갑·원피스 등을 착용한 채 찍은 인물 사진들이 주를 이룬다.

근현대사의 의상·소품을 빌릴 수 있는 레트로 의상 대여전문점도 서울 종로구를 중심으로 늘어나고 있다. 의상을 세 시간 빌리는 데 드는 비용은 3만원 선이다.

‘미스터 선샤인’이 근현대사의 시대적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면 지난달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기성세대가 학교에서의 국사 수업에선 접하기 힘들었던 역사의 ‘사각지대’에 관심 갖는 계기로 작용했다. 관객 286만1343명을 동원한 이 영화는 40년대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을 무렵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우리말을 모으는 한글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4월 11일) 100주년을 맞아 주요 방송사에서도 올 초부터 근현대사의 유적지를 찾아 나서는 프로그램을 앞다퉈 방영하면서 교과서로만 접해온 역사가 피부로 와 닿고 있다. MBC의 예능 프로그램인 ‘선을 넘는 녀석들’은 지난 2월부터 한반도 편을 연속 방송하고 있다. 지난 2일 방송분에선 설민석 역사 강사가 연예인들과 제주도를 여행하며 100년 전 제주도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한 해녀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이들 프로그램이 기존 프로그램의 틀에다 이러한 콘텐트를 삽입한 것이라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새로 선보인 프로그램도 있다. KBS1이 지난 1월부터 방영하는 ‘도올아인 오방간다’가 대표적이다. 근현대사 100년의 의미 등에 대해 도올 김용옥과 배우 유아인이 관객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토크콘서트 형식이다. 지난달 16일 방송분에선 한문으로 가득한 기미독립선언서 원문 전체를 한글로 알기 쉽게 풀이해 시청자의 공감을 샀다.

독립운동가 발자취 따라 중국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여행객들이 역사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들어가고 있다.

중국 상하이에서 여행객들이 역사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들어가고 있다.

100년 전 그날의 발자취를 찾아가려는 역사 여행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일반인이 참여하는 역사 여행 프로그램도 많아졌다. 모두투어는 3·1운동이 펼쳐졌던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순국 선열의 혼을 느낄 수 있는 1일 코스의 투어 상품을 서울권·경기권으로 나눠 선보였다. 서울권 투어는 3·1운동의 기원지라 할 수 있는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태화관 터, 천도교 중앙대교당, 승동교회 서대문형무소 등을 둘러본다. 경기권 투어에선 수원 일대의 3·1운동 시발점인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을 비롯해 삼일학교,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등을 참관한다. 원형진 모두투어 브랜드전략부 차장은 “투어 내내 역사 강사가 송수신기를 활용해 참관객에게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하나투어는 3·1운동을 기념해 지난 2월 25일부터 3월 2일까지 은동진 역사 전문강사가 동행해 중국 상하이·항저우·자싱을 돌며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4일 코스 여행 프로그램을 출시했다. 이번 여행에는 일반인 100여 명이 참가했는데, 상하이 옛 거리와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축이었던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의거지를 차례로 돌아봤다. 이달 21~25일엔 여순감옥이 있는 중국 다롄으로 역사테마여행을 떠난다. 앞서 하나투어는 2016년 10월 영화 ‘밀정’의 독립운동 배경지를 관광하는 ‘밀정 투어’를, 지난해엔 ‘전문가와 함께하는 역사 그랜드투어’를 선보였다. 일제 탄압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는 교육 여행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 여행 프로그램은 내달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을 맞아 한국 독립운동 역사의 기억이 짙게 남아있는 중국 상하이로 떠나는 역사 테마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조일상 하나투어 홍보팀장은 “한국사 강사가 일정 내내 동행하면서 각 관광지에서 생생한 현장 강의를 하는 것은 물론 호텔로 돌아와서도 세미나실에서 별도의 역사 강의가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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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과 앱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도 근현대사의 의미가 돋보이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양해일은 지난달 27일 프랑스 파리의 리츠호텔에서 열린 ‘해일 2019 가을·겨울(FW) 파리 패션위크 쇼’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의상(사진1)을 선보였다. 태극기에서 얻은 영감에 한국 전통의 책가도(문구와 골동품을 그린 그림)를 접목해 제작한 남녀 정장·원피스 등 40여 벌의 의상은 파리 패션가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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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 안중근 같은 역사 속 인물을 증강현실(AR) 기술이 적용된 캐릭터로 만날 수 있는 앱(사진2)도 출시됐다. 회사원 강지현(42·서울 청담동)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한국사를 어렵게만 느꼈는데 요즘엔 앱을 통해 놀이하듯 한국사를 익히고 있어 신기하다”고 말했다.

글=정심교 기자 simkyo@joongang.co.kr, 사진=각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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