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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로봇 박사 되려면 물리와 친해지세요"

중앙일보

입력

“★걸스로봇은 기자 출신인 이진주 대표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됐습니다. 이공계에 워낙 여성들이 적은데 그것이 여성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이공계에 진출한 여성들도 결혼·출산·육아 등의 문제로 쉽게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걸스로봇은 남성 중심적 분야인 이공계에 더 많은 여성들이 진출해서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시작됐어요.”

자유학기제 웹진 꿈트리의 ‘자기주도진로 인터뷰’ 21.'걸스로봇' 1호 펠로우 이세리 로봇공학자

이세리(27)씨는 국민대 기계시스템공학부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 공과대학 인간중심소프트 로봇기술연구센터 참여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또 걸스로봇 1호 펠로우(연구 회원)이자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면서 과학을 대중에게 쉬운 언어로 알리는 역할에 앞장서고 있죠.

로봇축구 동아리로 맺은 로봇과의 인연
세리씨는 중학교 때부터 과학을 좋아했어요. 역사 같은 암기과목은 시험 성적이 안 좋은 편이었지만 과학 과목은 늘 성적이 잘 나왔죠.

“중학교 때 흔히 ‘F=ma’로 알고 있는 가속도의 법칙을 처음 배웠는데 무척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물체가 움직이는 과정이 하나의 식으로 환산되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꼈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나는 이과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고양외국어고에 입학했는데, 이과가 강한 외고였어요. 거기서도 물리1, 물리2를 선택해 공부하면서 계속 물리의 길을 걸었던 것 같아요.”

이세리씨는 걸스로봇의 지원으로 참가한 휴머노이드 학회에서 데니스 홍 교수를 인터뷰했다.

이세리씨는 걸스로봇의 지원으로 참가한 휴머노이드 학회에서 데니스 홍 교수를 인터뷰했다.

고3 때 담임 선생님과 대입 상담을 할 때도 대학교 간판보다는 오로지 기계과를 가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원한 세 군데 모두 불합격. 재수를 했지만 결과는 더 나빴어요. 2013년 국민대 기계공학부에 입학해 첫 1학기는 조용히 보냈죠. 그러던 중 밴드부 선배로부터 로봇축구 동아리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시 로봇 분야에 남다른 열정이 있던 조백규 교수가 학생들과 로봇축구를 하기 위해 만든 연구 동아리로, 세계적인 행사인 로보컵 출전을 위해 2013년에는 네덜란드에 갔다 왔고 2014년에는 브라질에 간다는 얘기였죠. 세리씨는 브라질에 간다는 말에 바로 그 동아리에 가입했죠. 로봇과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공대생이긴 하지만 코딩에 대해서는 기초도 모르는 왕초보였기에 로봇에 대한 생각 역시 일반인과 별로 다르지 않았죠. 그런데 동아리 활동 첫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최첨단 기술을 기대하며 갔는데 로봇을 걷게 하기 위한 코드(오픈소스)를 열어놓고 분석하고 있었어요. 로봇이 걸어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했는데 한 대의 로봇을 걷게 하려면 엄청난 코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죠.”

코딩을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로봇축구 동아리 활동을 통해 그는 로봇 분야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물론 2014년 7월 19일 브라질에서 열린 제18회 ★세계로보컵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했고요. 이 대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대당 800만원 상당의 휴머노이드로봇이 적어도 다섯 대는 필요했는데요. 동아리 활동이 아니었다면 석사나 박사 과정이 아닌 학생이 비싼 로봇을 직접 만들고 시연하는 경험을 못 했을 거라고 해요.

휴머노이드 학회에서 전시된 로봇을 살펴보는 모습.

휴머노이드 학회에서 전시된 로봇을 살펴보는 모습.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와의 만남 또한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었죠. 2014년 대학 2학년이던 세리씨가 ‘로봇공학을 위한 열린 모임(로열모)’ 페이스북 그룹에서 청년 모임의 운영진으로 활동할 때였어요. 로봇 관련 강연회에 나설 연사들을 찾던 중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섭외한 이 대표는 이공계 여성 후배들을 지원하는 단체를 준비 중이었죠. ‘로열모’ 2회 정기모임이 열린 2015년 11월, 소셜벤처 걸스로봇도 동시에 론칭했습니다. 세리씨는 걸스로봇 1호 펠로우로서 장학금 등 많은 지원을 받았고 또 왕성하게 활동했죠.

2016년에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휴학했지만, 걸스로봇과 로봇축구 동아리 활동은 이어갔어요. 그해 11월에는 걸스로봇의 지원을 받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 최대 휴머노이드 학회 ‘휴머노이드 2016’에 참가했죠. 이때 세계적인 로봇과학자 ★데니스 홍 교수를 인터뷰할 기회도 얻었어요. 데니스 홍 교수는 당시 ‘발루(BALLU)’, ‘나비로스(NABiRoS)’ 등 신개념 로봇을 소개해 세계 로봇 과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요. 인터뷰 내용은 로봇신문과 걸스로봇 홈페이지에 게재됐습니다.2017년 1월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전시회(CES·전자제품 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했죠.

“현장에 가보니 완전 별천지였어요. 워낙 넓어서 볼거리도 많았고 듣고 싶었던 연사들의 강연도 많았어요. 하지만 CES에 참가하면서 퍼블리(Publy)라는 지식 콘텐트 플랫폼에 '자율주행차'를 주제로 글을 쓰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실 제 이력은 자율주행차나 인공지능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데 인터뷰를 하고 글도 써야 했으니 몹시 부담스러웠죠. 출국 전날까지 국민대에서 자동차 전공 교수를 인터뷰하고, CES 현장에서도 무작정 자동차 부스에 가서 엔지니어를 만나 무모하게 인터뷰를 했어요.”

로봇 솔루션 회사인 '로보티즈'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당시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로보컵 2017'에 참가했다.

로봇 솔루션 회사인 '로보티즈'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당시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로보컵 2017'에 참가했다.

걸스로봇·과학커뮤니케이터 기회 잡아
복학 후 로봇축구 동아리 친구들의 요청으로 2018년 평창올림픽 기간에 열릴 세계 첫 스키로봇챌린지를 준비하는 팀에 합류했어요. 자율주행 부문에서 동메달을 수상하는 행운도 거머쥐었죠. 세리씨는 휴학 기간마저 꽉 채워서 활동한 대학 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한동안 소속이 없는 ‘백수’ 상태가 되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었고 우울증까지 왔어요. 그때 한국과학창의재단의 과학커뮤니케이터를 선발하는 대회인 ‘페임랩’에 도전하게 됐죠. 3분 안에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과학을 설명하는 3분 스피치 대회였는데요. 세리씨는 당당히 상위 10명 안에 들었습니다.

“과학커뮤니케이터 활동을 하면서 소속감도 생기고 차츰 마음의 안정도 찾았어요. 하지만 연구자로서 좀 더 내실을 쌓아야 할 시점이었죠. 이진주 대표님의 도움으로 서울대 공과대학 인간중심소프트 로봇기술연구센터 연구실에 들어가게 됐어요. 지금은 이전까지 했던 하드로봇과 전혀 다른 분야인 소프트로봇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의 '페임랩 코리아 2018'에서 스피치를 하는 이세리씨. [한국과학창의재단]

한국과학창의재단의 '페임랩 코리아 2018'에서 스피치를 하는 이세리씨. [한국과학창의재단]

여전히 10대 여학생들에게 공대나 기계공학과, 로봇공학 등은 멀게 느껴지는 분야일 텐데요. 세리씨는 이 분야에 더 많은 여학생들이 진출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변화와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변화 모두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요즘은 '보쉬' 같은 회사에서 공구 장난감을 판매하기도 하는데, 예쁜 공구 장난감을 만든다면 여자아이들도 친근하게 갖고 놀 수 있지 않을까요. 공구가 예쁘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으니까요. 이를 통해 공학이라는 것이 ‘귀엽다, 팬시(fancy·장식이 많은, 화려한)하다’라는 느낌을 갖는다면 자라나서도 이 분야를 더 많이 선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청소년 과학커뮤니케이터를 양성하는 대회인 과학 토크 오디션 '톡신(Talk Scene)'이나 ‘다들배움’ 프로그램을 이용해 볼 것도 제안했어요. ‘다들배움’은 과학을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는 50명의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이 전국 어디든 찾아가는 프로그램으로, 교사가 신청하면 학교 단위로 참여할 수 있죠. 세리씨는 공대, 특히 로봇공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청소년에게 조언했습니다.

“중·고교 때 물리라는 과목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과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리라는 과목의 특성 때문인데 무척 안타깝습니다. 로봇공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를 좋아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공식을 암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물리를 싫어합니다. 물리는 이것저것 생각을 통해서 사고실험을 하는 느낌으로 진득하게 시간을 들여 공부해야 합니다.”

걸스로봇에서 ‘함께하는 과학행진(March for Science)’에 참가해 ‘핑크부스’를 운영했다. [걸스로봇]

걸스로봇에서 ‘함께하는 과학행진(March for Science)’에 참가해 ‘핑크부스’를 운영했다. [걸스로봇]

★걸스로봇(Girl’s Robot): ‘누구나 공학자가 될 수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소셜벤처. 설립자 이진주 대표는 ‘걸스로봇’을 통해 남성이 지배하는 이공계에 더 많은 여성이 진출해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다.

★세계로보컵 선수권 대회: 1997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세계 로봇공학자들이 참여하는 로봇 기술의 각축장2014년에는 ‘월드컵 개최국에서 연이어 로봇시합도 진행해 보자’는 취지로 브라질 북동쪽 해변도시 주앙페소아에서 제18회 대회가 열렸다.

★데니스 홍(한국명 홍원서):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기계항공공학과 교수이자 세계적인 로봇 연구소 '로멜라(RoMeLa)'의 연구소장이다. 한국계 미국인 로봇공학자로, 축구 휴머노이드 로봇 등으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자율시스템, 인간형 로봇, 운동학, 로봇기계공학 디자인, 로봇 운동 기계학 등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 시각장애인 혼자 운전할 수 있게 하는 운전 보조 시스템과 미니 휴머노이드 로봇 ‘다윈OP’ 등으로 유명하다.

글=김은혜 꿈트리 에디터

※’자기주도진로’ 인터뷰는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행하는 자유학기제 웹진 ‘꿈트리(dreamtree.or.kr)’의 주요 콘텐트 중 하나입니다. 무엇이 되겠다(what to be)는 결과 지향적인 진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겠다(how to live)는 과정 중심의 진로 개척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틀에 박힌 진로가 아닌,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진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재의 성공 여부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고, 남들이 뭐라 하든 스스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길’을 점검해 보시기 희망합니다. 꿈트리 ‘자기주도진로’ 인터뷰는 소년중앙과 협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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