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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넘기긴 아쉽다,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어야 할 책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27)

서울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 [뉴스1]

서울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 [뉴스1]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학교에서야 정독과 속독 정도만 일러주지만, 책의 내용, 성격과 읽는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읽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예를 들면 공부 삼아 읽는 책, 뭔가 필요해서 읽는 책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야 한다. 이른바 정독(精讀)이다. 읽는 중간중간 메모를 하기도 한다. 심심풀이로, 재미 삼아 읽는 책이라면 굳이 이렇게 읽는 이는 없을 것이다. 버스에서 흔들리며 혹은 빈방에서 뒹굴거리며 쉭쉭 책장을 넘기면 된다. 이렇게 속독(速讀)으로 줄거리만 좇아가도 책 읽는 의의는 충분하다.

이것이 목적에 따른 독서법이라면 책 내용에 따른 독서법도 있다. 책의 목차를 보고 필요한 장(章)만 골라 읽어도 무방한 책이 있는가 하면 내킬 때 아무 데나 펼쳐 들고 읽어도 충분히 소임을 다하는 책이 있다. 잠언집처럼 매일 조금씩 끈기 있게 읽어야 독파가 가능한 책도 있긴 하다. 개인적으로는 읽어가다 자신과 맞지 않거나 흥미가 없어져 책을 덮는 것도 나름 추천할 만한 독서법이라 여긴다.

오늘은 야금야금 읽기를 소개하련다. 한꺼번에 후루룩 읽어치우기엔 너무 아깝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가야 할 대목이 많은 책을 읽기에 맞춤인 방법이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김서령 지음, 푸른역사.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김서령 지음, 푸른역사.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김서령 지음, 푸른역사)는 제목에서 보듯 음식 관련 에세이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지은이는 글에 관심 많은 이들 사이에선 ‘서령체’라 불리는 독특한 글을 쓰는, 이름난 글쟁이였다. 그가 고향인 경북 안동의 우리 먹거리를 둘러싼 이야기를 풀어낸 글을 모은 책인데 음식, 고향, 추억, 삶을 몇 날 며칠 두루 우려낸 ‘곰국’ 같은 책이다.

책 제목이 된 ‘배추적’은 겨울밤 지은이 집에 마실 온 마을 처녀들과 아지매, 할매들의 군것질거리였다. 매콤한 겨울 배추에 밀가루를 묻혀 구워낸 ‘배추적’의 밍밍하고 싱거운 맛을 ‘생속’은 가진 이들은 모른다 했다. 얼마간 세상을 살고 난 후엔 절로 아픔에 내성이 생긴 ‘썩은 속’을 가진 이들이나 그 ‘깊은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배추적이라 했다.

온순하고 착한 호박뭉개미, 개결한 명태 보푸름, 슴슴한 무익지, 새근한 증편 같은 이야기에는 이제 쉬 만날 수 없는 아련함 혹은 슬쩍 서러움이 묻어난다. 여기에 지은이 고모의 “인생 참 허쁘다”란 탄식이 이해되는 연배라면 이 책 절대 내처 읽어낼 수 없다. 아까워서 혹은 먹먹해서, 어릴 적 맛난 과자를 몰래 숨겨두고 조금씩 아껴 먹었듯 한 편 한 편의 글을 음미하며 읽을 책이다.

다가오는 말들, 은유 지음, 어크로스.

다가오는 말들, 은유 지음, 어크로스.

『다가오는 말들』(은유 지음, 어크로스)도 야금야금 읽기가 어울리지만 그 이유가 김서령의 책과는 조금 다르다. 먹먹해서가 아니라 그냥 페이지를 넘기기엔 묵지근한 덕분이다. 지은이는 이미 전작인 『쓰기의 말들』 등으로 이름을 떨친 에세이스트. 베스트셀러 작가, 에세이,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란 부제에서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감상(感傷)과 미문 그런 것.

이 책은 그런 예상을 깨버린다. 자신을 ‘편견 많은 사람’이라 정의하는 지은이가 일상에서 읽고 들은 말을 화두 삼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편견을 허물려 애쓴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문장은 아름답지만 그 알맹이는 단단하다. 엄마의 노동, 사교육, 빈부 격차 등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일상’ 대해 발언한다. 그런데 그 울림이 크다. 그저 보고 지나치기 힘들 만큼, 그래서 꼭지마다 손으로 짚어가며 읽고 한참 새겨야 할 만큼, 그래서 찬찬히 읽어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게을리해놓고/…/틀어진 모든 것을/ 시대 탓하지 마라/ 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
지은이의 말에 인용된 어느 일본 시인의 작품이다. 지은이가 하고 싶은 말을 압축한 표현이겠는데 책 속엔 멋져서가 아니라 깊어서 지나칠 수 없는 구절이 숱하다. 눈에 띄는 대로 멈춰 새기고 가려니 책을 읽어내려면 뜻하지 않게 야금야금 읽을 수밖에. 실린 글 거의 모두에 범상치 않은 책들이 자연스레 인용되어 있기에 책 좋아하는 이들에겐 또 다른 기쁨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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