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29)
딱히 재주도 없으면서 시를 소개하는 일을 맡아 놓았더니, 시를 왜 읽어야 하는지를 자꾸 고민하게 된다. 아마도 ‘시가 이렇게 좋으니까 여러분도 제 글 통해 시 좀 접하세요’라고 독자를 설득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책자들까지 살펴가며 연구해본 결과, 시의 당위를 잘 모르겠다는 게 최근까지의 결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났다는 시인들의 작품과 그 해설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자꾸만 서양 철학자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석되고 있어 우리네 평범한 삶과는 통 접점이 없어 보이는 까닭이었다.
그런 와중에 서툰 솜씨로 쓰인 시 몇 편을 만났다. 시골 할머니들이 쓴 것이라는 데 맞춤법은 죄다 틀리고 세련된 비유 하나 찾기 힘들다. 그런데 읽고 있으면 슬며시 행복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시의 당위는, 이런 작품들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빨리 죽어야 데는데
십게 죽지도 아나고 참 죽겐네
몸이 아푸마
빨리 주거여지 시푸고
재매끼 놀 때는
좀 사라야지 시푸다
내 마음이 이래
와따가따 한다
-박금분, 「내 마음」 (영화 『칠곡 가시나들』 중에서)
먼저 눈에 띄는 건 소리 나는 대로 쓴 단어들이다. 현재 이 원고를 쓰고 있는 필자의 워드 프로세서에서는 '십게', '아나고', '죽겐네'와 같은 시어들에 빨간 밑줄이 쳐져 있다. 맞춤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형식은 틀렸을지언정, 내용에는 틀린 말이 하나 없다.
아플 때는 빨리 죽어야지 싶고 재밌게 놀 때는 좀 살아야지, 싶다는 서툰 고백에 생이 다 담겼다. 고통이란 피해갈 수 없고 인생이란 고통과 행복을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의 반복이라면, 결국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좀 더 자주 행복을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하고, 시를 읽으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이런 시도 있다.
농협에 갔다
인자 나도 한글 배운다
당당하게
이름 석자 썼는데
ㅁ을 빠뜨렸다
김말순이 그래서
기말순이 됐다
방학을 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썼을 텐데
그새 잊어 버렸다
그래도 한바탕
웃어으니
남은 거다
-김말순, 「기말순」 (2018경남성인문해교육 시화전 수상작)
시인, 한글도 배웠겠다, 은행 가서 당당하게 이름을 썼다. 예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이니 재미도 있고 자부심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실수로 미음 받침을 빼먹었다. 그 실수를 방학 탓으로 돌리는 능청스러운 태도가 흡사 어린아이의 그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한편 이 시가 말하는 인생론도 앞의 시와 다를 바가 없다. 김말순 할머니는 ‘된 거다’라거나 ‘좋았다’고 하는 대신, ‘남은 거다’라고 썼다. 삶이란 결국 한바탕 웃으며 행복했던 기억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시 판에서는 꽤 이름난 이성복 시인이 어디서 이런 말을 했다. 시란 ‘타인을 위해 신발을 바깥으로 돌려놓는 행위’라고 말이다. 누군가 내 신발을 그렇게 해 둔 걸 본다면 참 기쁠 것이다. 그 기쁨은 사람을 방방 뛰어다니게 만드는 종류는 아니겠지만, 가슴 한편이 오래 든든한 그런 작은 행복일 것이다. 시도 그 비슷한 것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시에 꼭 서양 철학자의 이론 같은 것이 필요한가. 다음 시를 읽어보면, 그게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가마이 보니까 시가
참 만타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다
-박금분, 「시」
할머니는 무심한 말투로 시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의 재료로 삼을 만한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매 순간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얘기일 텐데, 문제는 누구에게나 그것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가 행복이고 삶이란 행복한 기억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라면, 모두가 그런 것들을 찾으면서 살면 좋을 텐데 말이다.
발견하면 좋은 것들이 통 보이지 않으니, 그것들이 천지 삐까리(?)로 널려 있다는 시인의 눈을 빌리기로 한다. 그렇게 오늘도 시를 한 편 꺼내 든다. 결국 시를 읽는다는 것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진솔하고도 조용한 선언일 것이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