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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죽어야 데는데, 십게 죽지도 아나고 참 죽겠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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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29)

딱히 재주도 없으면서 시를 소개하는 일을 맡아 놓았더니, 시를 왜 읽어야 하는지를 자꾸 고민하게 된다. 아마도 ‘시가 이렇게 좋으니까 여러분도 제 글 통해 시 좀 접하세요’라고 독자를 설득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책자들까지 살펴가며 연구해본 결과, 시의 당위를 잘 모르겠다는 게 최근까지의 결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났다는 시인들의 작품과 그 해설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자꾸만 서양 철학자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석되고 있어 우리네 평범한 삶과는 통 접점이 없어 보이는 까닭이었다.

그런 와중에 서툰 솜씨로 쓰인 시 몇 편을 만났다. 시골 할머니들이 쓴 것이라는 데 맞춤법은 죄다 틀리고 세련된 비유 하나 찾기 힘들다. 그런데 읽고 있으면 슬며시 행복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시의 당위는, 이런 작품들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주인공 칠곡늘배움학교 할머니들. 평균나이 86세 할머니들이 인생 끝자락에서 한글을 배우게 되면서 한글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다뤘다. [중앙포토]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주인공 칠곡늘배움학교 할머니들. 평균나이 86세 할머니들이 인생 끝자락에서 한글을 배우게 되면서 한글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다뤘다. [중앙포토]

빨리 죽어야 데는데
십게 죽지도 아나고 참 죽겐네
몸이 아푸마
빨리 주거여지 시푸고
재매끼 놀 때는
좀 사라야지 시푸다
내 마음이 이래
와따가따 한다
-박금분, 「내 마음」 (영화 『칠곡 가시나들』 중에서)

먼저 눈에 띄는 건 소리 나는 대로 쓴 단어들이다. 현재 이 원고를 쓰고 있는 필자의 워드 프로세서에서는 '십게', '아나고', '죽겐네'와 같은 시어들에 빨간 밑줄이 쳐져 있다. 맞춤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형식은 틀렸을지언정, 내용에는 틀린 말이 하나 없다.

아플 때는 빨리 죽어야지 싶고 재밌게 놀 때는 좀 살아야지, 싶다는 서툰 고백에 생이 다 담겼다. 고통이란 피해갈 수 없고 인생이란 고통과 행복을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의 반복이라면, 결국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좀 더 자주 행복을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하고, 시를 읽으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이런 시도 있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한 장면. [중앙포토]

농협에 갔다
인자 나도 한글 배운다
당당하게
이름 석자 썼는데
ㅁ을 빠뜨렸다
김말순이 그래서
기말순이 됐다
방학을 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썼을 텐데
그새 잊어 버렸다
그래도 한바탕
웃어으니
남은 거다
-김말순, 「기말순」 (2018경남성인문해교육 시화전 수상작)

시인, 한글도 배웠겠다, 은행 가서 당당하게 이름을 썼다. 예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이니 재미도 있고 자부심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실수로 미음 받침을 빼먹었다. 그 실수를 방학 탓으로 돌리는 능청스러운 태도가 흡사 어린아이의 그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한편 이 시가 말하는 인생론도 앞의 시와 다를 바가 없다. 김말순 할머니는 ‘된 거다’라거나 ‘좋았다’고 하는 대신, ‘남은 거다’라고 썼다. 삶이란 결국 한바탕 웃으며 행복했던 기억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시 판에서는 꽤 이름난 이성복 시인이 어디서 이런 말을 했다. 시란 ‘타인을 위해 신발을 바깥으로 돌려놓는 행위’라고 말이다. 누군가 내 신발을 그렇게 해 둔 걸 본다면 참 기쁠 것이다. 그 기쁨은 사람을 방방 뛰어다니게 만드는 종류는 아니겠지만, 가슴 한편이 오래 든든한 그런 작은 행복일 것이다. 시도 그 비슷한 것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시에 꼭 서양 철학자의 이론 같은 것이 필요한가. 다음 시를 읽어보면, 그게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詩스타 박금분 할머니. [중앙포토]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詩스타 박금분 할머니. [중앙포토]

가마이 보니까 시가
참 만타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다
-박금분, 「시」

할머니는 무심한 말투로 시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의 재료로 삼을 만한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매 순간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얘기일 텐데, 문제는 누구에게나 그것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가 행복이고 삶이란 행복한 기억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라면, 모두가 그런 것들을 찾으면서 살면 좋을 텐데 말이다.

발견하면 좋은 것들이 통 보이지 않으니, 그것들이 천지 삐까리(?)로 널려 있다는 시인의 눈을 빌리기로 한다. 그렇게 오늘도 시를 한 편 꺼내 든다. 결국 시를 읽는다는 것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진솔하고도 조용한 선언일 것이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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