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호텔 셰프 비법으로 부활했다…제주의 특별한 골목식당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제주 애월 '해성도뚜리'의 토마토짬뽕. 신라호텔 셰프의 도움을 받아 개발한 메뉴로, 제주 해산물의 맛을 한껏 살렸다. 손민호 기자

제주 애월 '해성도뚜리'의 토마토짬뽕. 신라호텔 셰프의 도움을 받아 개발한 메뉴로, 제주 해산물의 맛을 한껏 살렸다. 손민호 기자

맛있는 제주 만들기.
제주도 식당 22곳의 간판에 적힌 글귀다. 무슨 뜻일까. 사연이 꽤 길다. 2013년으로 시간을 돌려야 한다.

신라호텔의 맛있는 제주 만들기 #재개장 22곳 중 4곳의 맛집 열전 #제주 식재료에 호텔 레시피 결합 #“손님 맞이하는 태도도 배운 것”

1년에 중국인 300만 명이 제주도를 방문하던 시절, 제주 언론들은 비판 보도를 쏟아냈다. 엄청난 수의 중국인 관광객이 들어와도 신라·롯데 같은 대형 면세점만 배를 불린다며 정부와 업체의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화들짝 놀란 면세점들이 서둘러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그때 면세점이 벌인 사업 중에 ‘맛있는 제주 만들기’도 있었다. 신라호텔 셰프들이 동네 식당을 개조하는 프로젝트였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원조인 셈이다.

그 프로젝트가 5년째 이어오고 있다. 새 식당도 꾸준히 열고, 선정된 식당도 수시로 점검한다. 생색내기용인 줄 알았는데, 뜻밖이다. 거듭난 식당 22곳 가운데 4곳만 골랐다. 기준은 관광객이 일부러 찾아갈 만한 맛집이다.

 보말의 재발견 - 보말과 풍경  

제주 대정 '보말과 풍경'의 보말죽. 창자를 버리지 않은 보말을 기본으로 다시마와 바지락을 넣어 육수를 냈다. 보말죽이 연두색인 까닭이다. 손민호 기자

제주 대정 '보말과 풍경'의 보말죽. 창자를 버리지 않은 보말을 기본으로 다시마와 바지락을 넣어 육수를 냈다. 보말죽이 연두색인 까닭이다. 손민호 기자

대정읍사무소 건너편의 낡은 식당이다. ‘보말과 풍경’을 신라호텔은 ‘4&7호점’이라고 부른다. 맛있는 제주 만들기 4호점과 7호점을 합친 집이라는 뜻이다. 4호점 주인 박미희(60)씨가 7호점 자리에서 장사를 한다. 7호점 주인이 건강 문제로 식당을 못하게 되자, 제주 시내에 있던 박씨가 대정의 가게와 메뉴를 물려받았다.

간판에 보말을 내건 식당답게 보말죽과 보말칼국수가 대표 음식이다(각 9000원). 보말은 고둥의 제주 방언으로, 보말죽은 해녀의 음식이었다. 보말죽 한 그릇으로 해녀들은 물질의 허기를 달랬다. 해녀 밥상에 오르던 보말죽을 백반집 메뉴로 개발한 건, 신라호텔 주방의 제안 덕분이었다.

제주신라호텔 박영준 수 셰프와 '보말과 풍경' 주인 박미희씨. '맛있는 제주 만들기'에 선정된 모든 식당들이 박영준 셰프의 눈높이 교육을 받았다. 박 셰프는 수시로 식당을 방문해 레시피를 점검한다. 손민호 기자

제주신라호텔 박영준 수 셰프와 '보말과 풍경' 주인 박미희씨. '맛있는 제주 만들기'에 선정된 모든 식당들이 박영준 셰프의 눈높이 교육을 받았다. 박 셰프는 수시로 식당을 방문해 레시피를 점검한다. 손민호 기자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셰프는 “5년 전에는 제주에서도 보말이 흔한 식재료가 아니었다”며 “4&7호점의 자랑이라면 제주 고유의 식재료로 메뉴를 확장했다는 점”이라고 소개했다. 4호점이 처음 문을 연 2014년엔 보말 1㎏이 2만원대였지만, 지금은 4만원대라고 한다.

육수에도 신라호텔의 비법이 들어있다. 바지락과 다시마가 들어간다. 해녀는 보말죽이나 전복죽을 끓일 때 창자를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푸르죽죽하다. 이 집도 죽이 푸르다. 짙은 녹색은 아니고 옅은 녹색, 연두색이다. 바지락과 다시마 때문이다. 국물 맛도 다르다. 해녀의 죽보다 가볍고 담백하다.

'보말과 풍경' 풍경정식에 나오는 돔베고기와 강된장. 고기를 삶을 때 신라호텔의 비법이 들어갔다. 된장과 쌈장, 커피까지 넣고 삶았단다. 강된장만으로도 밥 한 그릇이 부족하다. 손민호 기자

'보말과 풍경' 풍경정식에 나오는 돔베고기와 강된장. 고기를 삶을 때 신라호텔의 비법이 들어갔다. 된장과 쌈장, 커피까지 넣고 삶았단다. 강된장만으로도 밥 한 그릇이 부족하다. 손민호 기자

7호점 메뉴를 물려받은 ‘풍경정식(9000원)’은 백반이다. 돔베고기·강된장·고등어구이·계란말이 등으로 구성된다. 하나하나 신라호텔의 비법이 배어 있다. 박씨는 “보말죽과 보말칼국수는 관광객이, 풍경정식은 제주도민이 주로 찾는다”고 말했다.

 짬뽕인가 파스타인가 - 해성도뚜리

'해성도뚜리'의 대표 메뉴 토마토짬뽕. 따로 끓인 육수를 붓고 있다. 특제 토마토소스가 들어있어 얼큰한 짬뽕 국물에서 달짝지근한 파스타 맛이 난다. 손민호 기자

'해성도뚜리'의 대표 메뉴 토마토짬뽕. 따로 끓인 육수를 붓고 있다. 특제 토마토소스가 들어있어 얼큰한 짬뽕 국물에서 달짝지근한 파스타 맛이 난다. 손민호 기자

섬 서쪽 애월읍 구엄리에 있다. 해안도로와 붙어있어 창문 너머로 바다가 훤하다. 해안을 따라 제주올레 16코스가 지난다. 여느 바다 전망 카페 못지 않은 전망이다.

‘해성도뚜리’는 맛있는 제주 만들기의 으뜸 성공 사례다. 2015년 3월 9호점으로 재개장했다. 원래는 고깃집이었다. 흑돼지 목살과 오겹살 구이를 팔았다. 이름의 ‘도뚜리’도 돼지를 뜻하는 제주 방언 ‘톳’에서 비롯됐다. 흑돼지 메뉴는 지금도 있다.

기존 메뉴에 하나 더 얹었을 뿐이다. 그런데 재개장 전보다 매출이 3배 넘게 뛰었다. 운명을 바꾼 기적의 메뉴는 토마토짬뽕(1만1000원). SNS에서도 반응이 뜨거운 ‘잇템(ITtem)’이다.

'해성도뚜리' 주인 김자인씨. 토마토짬뽕을 낸 뒤로 가게 매출이 3배 이상 뛰었단다. 손민호 기자

'해성도뚜리' 주인 김자인씨. 토마토짬뽕을 낸 뒤로 가게 매출이 3배 이상 뛰었단다. 손민호 기자

처음부터 짬뽕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식당이 들어선 구엄리는 바다가 예쁜 포구 마을이다. 젊은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맨 처음 라면을 떠올렸다. 해산물 푸짐한 특제 라면. 젊은 층을 겨냥한 선택이었다.

육수를 개발하다 메뉴가 달라졌다. 앞바다에서 뜯어온 톳과 미역을 넣고 끓였다가, 토마토소스·굴소스·된장소스로 만든 특제 토마토소스까지 넣고 끓였더니 파스타 맛이 나는 국물이 나왔다. 여기에 제주 바다에서 나는 황게와 딱새우를 넣었고, 채소는 짬뽕처럼 볶아 불맛을 살렸다. 동서양의 국물이 극적으로 어우러진 비결이다. 국물 맛은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개운하면서도 묵직하고, 얼큰하면서도 달짝지근하다.

주인 김자인(56)씨는 “토마토짬뽕 덕분에 흑돼지 구이도 더 많이 팔린다”고 자랑했다. 고기 먹은 뒤 식사용으로 냉면을 준비했는데, 냉면은 하루에 한두 그릇 팔기도 힘들단다.

 장인의 필살기 - 동동차이나

제주 시내 '동동차이나'의 오동환 대표가 막 끓인 백짬뽕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호텔의 중식 레스토랑 '팔선'의 비법이 이 걸쭉한 국물에 배어 있다. 손민호 기자

제주 시내 '동동차이나'의 오동환 대표가 막 끓인 백짬뽕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호텔의 중식 레스토랑 '팔선'의 비법이 이 걸쭉한 국물에 배어 있다. 손민호 기자

제주도청과 가깝다. 영락없는 동네 중국집이다. 주택가 골목 안에 자리한 위치도 그렇고, 손님의 90%가 제주 주민인 것도 그렇다. 중국음식 하면 떠오르는 짬뽕·짜장면·탕수육이 대표 메뉴인 점도 마찬가지다. 신라호텔의 중식 레스토랑 ‘팔선’이 자랑하는 불도장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그러나 이 집은 내공이 다르다. 팔선의 정신을 사사했다.

'동동차이나' 백짬뽕에 들어가는 채소와 해산물. 웍에서 볶아 불맛을 살린 채소와 해산물에 따로 끓인 국물이 들어간다. 손민호 기자

'동동차이나' 백짬뽕에 들어가는 채소와 해산물. 웍에서 볶아 불맛을 살린 채소와 해산물에 따로 끓인 국물이 들어간다. 손민호 기자

동동차이나는 2014년 3월 2호점으로 재개장했다. 개장을 즈음해 서울신라호텔에서도 셰프들이 내려왔다. 특히 팔선을 이끌었던 후덕죽 상무가 2번이나 방문해 비결을 전수했다. 후덕죽(69) 상무는 중화요리계의 전설이다. ‘진진’의 왕육성, ‘목란’의 이연복 등 시방 장안을 휘어잡는 화교 요리사들에게 형님이자 스승으로 통한다.

동동차이나 오동환(48) 대표에게 전설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물었다. “너무 기교를 부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단순하지만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을 만들라는 뜻이었단다. 하여 이 집은 하나같이 기본에 충실하다.

명실상부한 1등 메뉴 백짬뽕을 보자. 생김새는 특별할 게 없다. 그러나 국물이 다르다. 닭 육수를 기본으로 돼지 사골을 넣어 육수를 낸다. 오씨는 “전에는 나도 맹물로 짬뽕을 끓였다”며 “육수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나자 이전의 내가 부끄러웠다”고 털어놨다. 국물을 떠먹어보니 진하다기보다 무거웠다. 고추씨와 청양고추가 내는 칼칼한 향과 잘 어울렸다.

'동동차이나' 벽에 걸린 액자. 후덕죽 상무의 친필 사인 옆에 이부진 신라호텔 대표가 오동환 대표 부인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도 걸려 있다. '맛있는 제주 만들기' 간판을 내건 식당 4곳 모두 벽에 이부진 대표와 찍은 기념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이 대표는 식당 주인에게 일일이 친필 편지를 주기도 했다. 손민호 기자

'동동차이나' 벽에 걸린 액자. 후덕죽 상무의 친필 사인 옆에 이부진 신라호텔 대표가 오동환 대표 부인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도 걸려 있다. '맛있는 제주 만들기' 간판을 내건 식당 4곳 모두 벽에 이부진 대표와 찍은 기념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이 대표는 식당 주인에게 일일이 친필 편지를 주기도 했다. 손민호 기자

기억에 남는 건 등심탕수육(1만5000원)이다. 탕수육이 가래떡처럼 쫄깃쫄깃했다. 고기 밑간부터 튀김 반죽, 기름에 튀기는 요령까지 신라호텔의 비법을 따랐단다.

 집밥 상차림 - 진미네식당 

제주시 '진미네식당'의 해물탕 상차림. 해산물 푸짐한 해물탕도 훌륭했으나, 더 기억에 남는 건 밑반찬들이었다. 날마다 시장에서 장을 봐 아침마다 반찬을 새로 한다고 했다. 손민호 기자

제주시 '진미네식당'의 해물탕 상차림. 해산물 푸짐한 해물탕도 훌륭했으나, 더 기억에 남는 건 밑반찬들이었다. 날마다 시장에서 장을 봐 아침마다 반찬을 새로 한다고 했다. 손민호 기자

제주시 노형로터리 주변 골목 안에 있다. 이 집도 동네 식당이다. 손님도 동네 사람이 대부분이다. 2014년 9월 6호점으로 재개장했다. 대표 메뉴는 해물탕(소 4만5000원)인데, 백반 메뉴인 진미정식(1만원)이 더 인기가 좋다.

주인 홍명효(53)씨의 손맛이 야무지다. 박영준 셰프도 “맛있는 제주 만들기에 참여한 식당 주인 22명 중에서 진미네식당 주인 솜씨가 최고라고 다들 말한다”고 거들었다. 진미정식 상차림에 올라온 반찬들, 그러니까 가지장아치·깻잎장아치·꽃멜젓(멸치젓의 종류)·김치 하나하나가 각별했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상처럼 정성이 느껴졌다. 홍씨는 “매일 새벽 동문시장에서 장을 봐 아침마다 반찬을 새로 한다”며 “김치는 늙은 호박 효소를 넣어 담근다”고 설명했다.

돔베고기·계란말이·강된장은 대정의 ‘보말과 풍경’과 같은 메뉴였다. 모두 신라호텔의 레시피를 재현한 음식이었으나 맛에서 차이가 났다. 특히 돔베고기는 식감이 남달랐다. 고기를 삶을 때 된장·쌈장·커피를 넣는 비법도 같지만, 음식은 레시피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 홍씨의 손맛 때문에 벌어진 일화도 있다. 맛있는 제주 만들기에 선정된 식당 주인들은 모두 한 달 동안 제주신라호텔에서 교육을 받는다. 이미 식당을 하던 사람들이어서 처음에는 호텔 주방의 정량화한 레시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홍씨가 유난히 심했단다. 박영준 셰프가 “6호점 사장님 고집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다”고 슬쩍 털어놨다.

제주 시내 '진미네식당' 홍명효 대표와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셰프. 손민호 기자

제주 시내 '진미네식당' 홍명효 대표와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셰프. 손민호 기자

'진미네식당'의 주방. 고등어를 구우면 식당에 냄새가 배 고등어 구이 옆에 쌀뜨물과 귤 껍질을 놓아 두었다. 식당에서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손민호 기자

'진미네식당'의 주방. 고등어를 구우면 식당에 냄새가 배 고등어 구이 옆에 쌀뜨물과 귤 껍질을 놓아 두었다. 식당에서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손민호 기자

지금은 홍씨의 손이 레시피를 기억한다. 해물탕을 끓일 때도 양념을 일일이 저울에 재지 않고 소스를 만든다. 홍씨는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홍씨는 “손님을 맞는 태도도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