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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의 초등 입학식 날 무용지물된 필름 카메라, 무슨 일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장연진의 싱글맘 인생 레시피(14)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수현(송혜교 분)이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남자친구 진혁(박보검 분) 사진을 찍는 모습. [사진 드라마 '남자친구' 홈페이지]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수현(송혜교 분)이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남자친구 진혁(박보검 분) 사진을 찍는 모습. [사진 드라마 '남자친구' 홈페이지]

배우 박보검의 팬인 둘째를 따라 얼마 전에 종방한 드라마 ‘남자친구’를 몇 회 봤는데 인상에 남는 장면이 있다. 바로 동화호텔 대표 차수현(송혜교 분)이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자신의 호텔 홍보팀 신입사원인 남자친구 김진혁(박보검 분)의 사진을 찍는 정경이다.

수현은 카페 창밖 난간에 기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진혁을 향해 한동안 셔터를 누르지 못한다. 자신 때문에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리고 급기야 지방 호텔로 쫓겨나는 진혁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슴에 사무쳐 카메라 뒤에서 몰래 눈물을 닦느라고 그랬다. 나도 그렇게 손바닥만 한 사진기 뒤에 숨어 기습하듯 북받치는 슬픔을, 아니 기쁨을 하염없이 훔친 적이 있다.

‘자립의 상징’으로 구입한 필름 카메라

캐논 EOS 300. 16년째 고이 ‘모셔’ 두고 있는 이 필름 카메라는 이혼한 다음다음 해에 장만했는데, 내겐 단순히 사진기가 아니라 ‘자립’의 상징이다. 셔터를 누르는 것조차 겁을 낼 정도로 기계치인 내가 아이들의 졸업식과 입학식을 앞두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이끌려 구입했다(원래 있던 카메라는 아이들 아빠가 업무용으로 겸하던 것이어서 가지고 나갔다).

“여기 버튼을 누르면 되는데 노출이 안 맞으면 사진이 날려요. (조리개를 돌리며) 이걸로 빛을 조절하고 피사체를 딱 맞춰서 찰칵.” ‘남자친구’에서 진혁은 수현에게 이렇듯 간단히 알려주지만, 나는 그 손쉬운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깨알 같은 설명서를 끙끙대며 독학해야 했다.

16년째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필름카메라. 첫째의 중학교 졸업식과 둘째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장만했다. 첫째의 졸업식을 지나 둘째의 입학식 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사진 장연진]

16년째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필름카메라. 첫째의 중학교 졸업식과 둘째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장만했다. 첫째의 졸업식을 지나 둘째의 입학식 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사진 장연진]

솔직히 필름을 넣는 것도 내겐 넘어야 할 산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카메라 덮개를 열어 생 필름을 왼쪽 공간에 거꾸로 집어넣고 그 뒷자락을 뽑아 오른쪽 원통 감개에 걸어 끼우기까지 손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그래서 뚜껑을 덮은 뒤 필름이 윙, 자동으로 감기는 소리를 듣는데 어찌나 흐뭇하던지.

그런데 사달은 엉뚱한 곳에서 났다. 코앞으로 다가온 첫째의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바보처럼 버벅댈까 봐 막 8살 된 둘째를 모델로 거실 소파에서 실전연습할 때였다. 렌즈 저 너머에서 손가락으로 V 자를 그리며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을 끌어당기는데 열 달 전 뇌수술을 받고 아직도 오른쪽 안면 근육이 덜 풀려 ‘썩소’를 머금고 있는 그 어린 피사체의 표정이 쓱 가슴에 걸리더니 코끝이 찡하게 저리는 게 아닌가!

마비된 근육이 온전히 되살아나면 예전처럼 해맑은 미소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애써 못 본 척했지만, 카메라 렌즈로 그 비딱한 웃음을 맞닥뜨리니까 새삼 눈물이 어려 초점이 흔들렸다.

조막만 한 머리에 붕대를 감고 병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반쪽 신경이 되살아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면 여기가 천국이야, 단지 얼굴 근육이 따라 움직여 주지 않아 짓는 저 웃음은 그래서 ‘썩소’가 아니라 ‘천국의 미소’야! 언젠간 꼭 웃으며 이 아픔의 시간을 추억의 한 장면처럼 얘기할 날이 올 거야. 카메라 뒤에서 그렇게 꿀꺽 눈물을 삼키고 나서야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입학식. 둘째의 입학식 땐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보라색 누비 투비스를 입고 흰색 반짝이 머리띠를 한 아이를 클로즈업하는데 내 마음과 상관없이 지난 고통이 밀려왔다. [뉴스1]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입학식. 둘째의 입학식 땐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보라색 누비 투비스를 입고 흰색 반짝이 머리띠를 한 아이를 클로즈업하는데 내 마음과 상관없이 지난 고통이 밀려왔다. [뉴스1]

하지만 둘째의 입학식 땐 그 셔터조차 누를 수 없었다. 첫째의 중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2주 후 9살 터울인 둘째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식이 시작되기 전 미리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체육관 중간 통로로 가 그새 친구가 됐는지 옆자리에 앉은 또래와 재잘거리는 둘째를 향해 말없이 카메라를 들이댈 때였다. 보라색 누비 투피스를 입고 흰색 반짝이 머리띠를 한 아이를 클로즈업하는데, 내 마음과 상관없이 다시금 지난 고통이 왈칵왈칵 눈앞에 어룽지는 게 아닌가!

계속 잠만 자던 아이의 눈이 하얗게 넘어가 부랴부랴 병원 응급실로 쫓아가던 일, 뇌혈관기형으로 뇌출혈을 일으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던 일, 수술 도중 사망할 수도 있다는 주치의의 설명을 들으며 속수무책으로 동의서에 사인하던 일, 수술실 앞에서 평생 뒷바라지만 하고 살아도 좋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일….

사진기 대신 마음속 필름에 담은 둘째 아이 입학식

아니 말도, 걷지도 못하던 아이가 그 힘든 재활치료를 꿋꿋이 이겨내고 제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뭉클뭉클 벅차오르는 감격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이날을 위해 꾹꾹 참았던 것처럼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렸다.

어느새 카메라 뷰파인더가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이 지워졌다. 둘째가 돌아볼세라, 체육관을 빙 두른 다른 학부모들이 흘깃거릴세라 셔터 한 번 누르지 못한 채 어른거리는 시야를 헤치고 황황히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교사 밖 한 귀퉁이에서 찬바람을 쐬며 하 하 가슴을 식혀야 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아이들을 뒤따라 학부모도 함께 교실로 이동했지만 어깨에 걸친 카메라엔 더 손을 대지 않았다. 복병처럼 또 언제 감정이 밀고 올라올지 몰라 아쉽지만 남기고 싶은 장면들을 마음속 필름에 담을 뿐이었다. 이다음에 생각날 때면 가슴속에서라도 인화해 펼쳐볼 수 있도록 찰칵! 찰칵!

장연진 프리랜서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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