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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갖춘 손흥민도 아버지의 '미래' 투자 없었다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강정영의 이웃집 부자이야기(20)

런던의 겨울은 해양성 기후로 비가 많고 으스스하다. 2월 중순 어느 날 밤, 9만 명을 수용한다는 영국 최대의 축구장 웸블리구장은 관중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스타디움 출입문을 통해 노란색 상의 유니폼에 어린아이들 손을 잡은 선수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들과 나란히 하얀색 유니폼의 선수 일단이 가벼운 몸놀림을 하며 함께 입장한다.

그때 마치 벤허의 대전차 경주가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에서 시작되려 듯 일순간 환호성이 귀를 먹먹하게 울려 퍼진다. 노란색은 독일 분데스리가 1위 팀 도르트문트이고, 하얀색은 영국 프리미어 리그 3위 팀 토트넘이다. 유럽 최고 명문 팀 간에 벌어지는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이 막 시작되는 순간이다.

영국 최대의 축구장 웸블리구장은 9만 명을 수용한다. 수많은 관중이 자리를 꽉 채운 경기장에는 세계적인 기업의 광고가 쉴 새 없이 번쩍인다. 사진은 손흥민이 골세리머니를 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영국 최대의 축구장 웸블리구장은 9만 명을 수용한다. 수많은 관중이 자리를 꽉 채운 경기장에는 세계적인 기업의 광고가 쉴 새 없이 번쩍인다. 사진은 손흥민이 골세리머니를 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전반전은 탐색전으로 수비 위주 게임을 펼치며 무승부로 끝낸다. 그 사이 경기장 전광판에는 일본의 닛산 자동차, 스페인 국제은행 산탄데르, 러시아 석유회사 가즈프롬, 미국 마스터카드, 네덜란드 맥주 하이네켄, 호텔스닷컴의 광고판이 쉴 새 없이 경기장 주변을 번쩍이며 번갈아 돌아간다.

하프타임 후 후반 시작 2분여쯤에 벨기에 출신 얀 베르통언이 도르트문트 문전으로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리자 쇄도하던 한국의 스트라이커 손흥민이 오른발로 간결하게 차 골망을 가르며 영의 균형을 깬다. 스탠드의 홈팬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질러대는 함성이 런던의 밤하늘을 가른다. 아르헨티나 출신 포체티노 감독도 두 손을 불끈 쥐면서 환호한다.

반대편 스위스 국적 루시엥 파브르 감독은 고개를 떨구며 망연자실 제자리에 한동안 서 있기만 하다. 장소는 영국 런던이지만 등장하는 주역들은 거의 모두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이다. 토트넘은 후반전 10여분이 남은 시점, 코트디부아르의 세르지 오리에의 크로스를 얀 베르통언이 두 번째 골을, 곧이어 덴마크 에릭센의 코너킥을 스페인의 요렌테가 헤딩 골로 연결한다. 팽팽하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져 3:0, 홈 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다.

프리미어 리그는 방송 중계료만 3년에 7조 7천억 원에 이르는 세계 제일의 축구 리그이다.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속해 있는 스페인 라리가보다 훨씬 많다. 왜 영국 프리미어리그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일까.

웸블리구장의 ‘그날 그 장면’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국제시장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세계적인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한 치도 양보 없는 경쟁을 한다. 자동차, 석유, 은행, 음료, 서비스 등을 모두 망라한 세계적인 회사들이 앞다투어서 전 세계 시청자를 대상으로 광고한다.

축구장에는 세계적인 선수들이 경기를 한다면, 국제시장에서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경기를 한다. [중앙포토]

축구장에는 세계적인 선수들이 경기를 한다면, 국제시장에서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경기를 한다. [중앙포토]

만약 모바일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업들, 한국 삼성, 중국 화웨이, 미국 애플이 축구경기로 경쟁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세계의 인재들이 모여서 제품을 만들고, 세계시장을 관통하는 트렌드를 읽어 그에 맞추고, 그리고 승부를 펼치는 장면이 웸블리구장에서 펼쳐지는 국제 경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미래의 전략을 짜고, 자사 제품의 강점을 소비자에게 어필하며, 전반전 성적이 부진하다면 그 원인을 찾아 후반전에 대비하는 것도 같다.

이제는 한반도로 눈을 돌려 보자. 지금 우리는 저런 치열한 승부에 대비하여 잘 준비하고 대처하고 있는가? 아닌 것 같다. 그간 운이 좋아서 조금 벌어둔 돈으로 잔치를 벌이다가 위기에 빠진 졸부 모양새는 아닐까. 아침에 눈을 뜨면 거의 예외 없이, 유명한 정·재계 인사들이 포승줄에 묶여서 호송차를 타는 뒷모습이 신문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잡힌 사람의 문제인지 잡는 사람의 문제인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다.

이런 모습을 하루가 멀다 않고 봐야 하는가? 조선 왕조를 망하게 한 고질적인 사색당파 싸움의 현대판 버전이 재현되는 것 같다. 미래를 위해 먹고 사는데 진지한 고민은 뒷전이고, 끝이 안 보이는 정쟁으로 날을 지새운다. 이렇게 싸움박질만 해도 미래가 있는 것인지 걱정된다. 한국 경제가 급속도로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더구나 두꺼운 중산층이 질 좋은 일자리 감소로 줄어들고 있다.

청년들이 청년일자리센터에서 열리는 강연을 듣고 있다. 한국은 질 좋은 일자리가 줄면서 두터운 중산층이 감소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청년들이 청년일자리센터에서 열리는 강연을 듣고 있다. 한국은 질 좋은 일자리가 줄면서 두터운 중산층이 감소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소수의 대기업을 제외하면, 경제의 허리를 지탱해야 할 중견 또는 중소기업 측이 빈약하고 취약한 문제를 시급히 보강해야 한다. 진보 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이 구조적인 과제를 방치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미래 먹거리를 위해 젊은 층을 교육 훈련하고, 그들이 협소한 국내 시장을 떠나 국제무대에서 맘껏 뛰놀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화살처럼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며칠 전 워싱턴에서 우방국 국회의장이 한국 국회 수뇌부에게 남한의 무장해제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오히려 걱정을 해주는 일이 있었다. 그야말로 기우에 그치기를 바란다. 한반도 평화회담은 잘되어야 하고 또 잘되기를 모두가 기대한다. 그러나 만약 실패한다면 한반도는 급속하게 위기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에 대비한 치밀한 ‘플랜 B’가 있는가. 아니면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가.

손흥민 선수에게 배울 게 많다. 그는 일찍부터 독일로 가 국제화된 선수로 키워졌다. 마인드도 대단하다. 세상에 그저 얻어지는 것이 없으니 미래를 위해 늘 노력과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아버지 철학이었다. 손흥민도 그런 뜻을 잘 따랐다. 그저 운이 좋아서 출중한 성적을 내는 경우는 없다.

이제 '월드 클래스'로 평가받는 그에게는 남다른 철학이 있고 혼신의 노력이 배어있다. 그와 같이 치밀하게 준비하고 훈련하면 기업도 국가도 국제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다. 손흥민 선수가 땀으로 일궈낸 성취가 오래오래 지속하기를 바란다.

강정영 청강투자자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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