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탭댄스는 심장의 웃음소리…‘EXO’의 도경수도 미치게 했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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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호 19면

‘올드 앤 뉴’ 탭댄스 맥 잇는 김길태 & 조성호

‘2019 서울 탭댄스 프린지’는 김길태(왼쪽)와 조성호를 비롯해 대한민국 프로 탭퍼들이 총출동하는 성대한 축제다. [신인섭 기자]

‘2019 서울 탭댄스 프린지’는 김길태(왼쪽)와 조성호를 비롯해 대한민국 프로 탭퍼들이 총출동하는 성대한 축제다. [신인섭 기자]

“탭댄스라는 거이 참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드만.”

‘대한민국 1세대 탭퍼’ 김길태 #탭댄스에 빠져 미국서 6년간 유학 #국내 탭퍼 70~80%가 그의 제자 #“다양하고 실험적 레퍼토리 개발 #에딘버러 프린지같은 축제 만들 것” #‘언터처블 쇼 디렉터’ 조성호 #13년 전 김 대표 제자로 입문 #‘스윙키즈’ 도경수 탭댄스 가르쳐 #“탭댄스 배우면서 대학도 그만둬 #악기처럼 관객과 소통 매력 있어”

영화 ‘스윙키즈’에서 주인공 로기수(도경수)의 대사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빨갱이’ 북한군 포로가 금기 중의 금기 ‘미제춤’에 빠져든 이유는 뭘까. ‘탭댄스 불모지’에 살면서 알기 힘들었던 ‘사람 미치게 만드는’ 탭댄스의 마력, 그 실체를 만날 기회가 왔다. ‘2019 서울 탭댄스 프린지’(3월 7~9일 마포아트센터)는 (재)마포문화재단(대표이사 이창기)과 탭꾼탭댄스컴퍼니의 공동주최로 탭 갈라·재즈&탭 콘서트·탭댄스 코미디·거대 탭 퍼포먼스 등 3일 동안 탭댄스에 관한 모든 것을 쏟아내는 축제다.

이 행사의 총괄기획·예술감독이자 ‘탭쇼’(9일) 공연의 연출자인 김길태(49) 탭꾼탭댄스컴퍼니 대표는 1990년대 미국에서 탭댄스 유학 후 2002년부터 한국 탭댄스계를 이끌고 있는 ‘리듬 탭댄스의 거장’. ‘대한민국 1호 리듬탭 탭퍼’‘국내 최초 탭콘서트 제작’‘국내 최초 탭댄스경연대회 개최’ 등 수많은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의 제자로 ‘골든에이지’(8일) 공연의 연출을 맡은 조성호(33) 골든에이지 밴드 리더는 ‘무한도전’ ‘불후의 명곡’ ‘K팝스타’ 등 방송3사 주말 황금시간대 프로그램에 모두 출연하고 현재 청담동 고급바 ‘겟올라잇’에서 가장 핫한 쇼 ‘골든에이지’ 디렉터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탭퍼다. 영화 ‘스윙키즈’ 안무팀으로 주인공 EXO 도경수의 일부 대역이자 탭댄스 스승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미8군 탭댄서 떠난 후 30~40년간 단절

영화 ‘스윙키즈’ 에서 탭댄스를 추는 도경수. [사진 NEW]

영화 ‘스윙키즈’ 에서 탭댄스를 추는 도경수. [사진 NEW]

“디오(도경수)가 춤을 잘 추는 아이돌이지만 워낙 바빠서 고생을 좀 했어요. 콘서트 연습을 아침부터 저녁 6시까지 하고, 저녁 먹고 밤 11시까지 탭 수업을 받는 식으로 4~5개월 준비했죠. 오래 걸렸지만 거의 대역 없이 대부분을 소화했는데, 정말 몸을 던지더군요. 어디 한 곳이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 놀랐습니다.”(조성호) “굉장히 잘한 겁니다. 4~5개월 만에 저 정도로 출 수 있나 싶더군요. 미리 좀 배운 줄 알았어요. EXO 안무가가 우리 연습실 출신이거든요.”(김길태)

한국에서 탭댄스를 업으로 삼고 있는 프로 탭퍼는 70~80명선. 그중 70~80%가 김 대표의 제자다. 그중에서도 조성호는 지금 가장 핫한 탭퍼다. “워낙 제자들이 많아 수제자라고 하긴 뭐한데, 사람들마다 전성기가 오르락내리락하거든요. 성호씨는 지금 현재 ‘언터처블’이죠. 제가 묻어가야 해요.(웃음)”(김) “운동을 했었는데, 탭댄스를 배우면서 대학도 그만뒀어요. 학교도 의미없더라구요. 평생 하고 싶은 걸 찾았으니까. 중간에 돈이 없어서 못 나간 적도 있는데, 선생님이 전화하셔서 돈에 연연하지 말라고 이끌어주신 기억이 나네요.”(조)

‘부산 사나이’ 김길태는 와이즈발레단 김길용 단장의 동생이다. 하지만 뉴욕에서 탭댄스를 만나기까진 춤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형이 고등학교 때 자퇴하고 춤추겠다고 아버지랑 싸우더군요. 그때만 해도 ‘무슨 남자가 춤을 추나’ 비웃었죠. 막상 내가 춰보니 몸에 맞는 속옷을 입은 느낌? 이렇게 좋은 거라 형도 했구나, 이해하게 됐어요. 미국에 어학연수 비자 받아서 1년만 있으려 했는데, 탭댄스에 계속 욕심이 생겨 결국 6년이 흘렀네요. 2001년 9·11 테러가 났을 때 제가 일하던 비빔밥집도 박살이 났는데, 그즈음 ‘하산해도 되겠다’는 스승님의 인정을 받고 돌아오게 됐죠.”(김)

2002년 ‘탭꾼탭댄스컴퍼니’ 설립 당시만 해도 한국은 ‘탭댄스 불모지’였다. 프로 탭댄서는 거의 없고, 뮤지컬 안무에 양념처럼 탭댄스가 들어가는 정도였다. “한국에도 1920~30년대 모던보이 탭댄서가 분명히 있었을 테죠. 이후 미8군에 탭댄서가 있었지만 군사정부 때 다 이 땅을 떠나면서 30~40년간 단절이 됐어요. 그러다 2000년대 뮤지컬붐이 일어날 즈음 제가 귀국한 거죠. 옛날 분들 탭댄스와 제가 새로 배워온 탭댄스는 전혀 다르거든요. 그래서 감히 ‘1세대’를 자처하는 거죠.”(김)

‘불모지’ 개척이 쉬울 리 없었다. 마포 합정동에 연습실을 오픈할 때만 해도 발레를 하던 형이 “미쳤냐”고 할 정도였다고. “인터넷도 거의 없던 시절이니 별다른 홍보수단도 없었죠. 백수라 대출도 안 돼서 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 월세 60만원짜리 연습실을 얻었어요. 처음 2년은 일주일에 렛슨 20개를 해도 한 달 벌이가 50만원도 안되더군요. 월세도 안 빠지는 걸 카드 돌려막기로 2년을 버텼죠. 2년쯤 지나니 조금씩 공연도 하게 되고 수강생도 늘더군요. 어느 날 갑자기 주목받은 적은 없어요. 저도 버틴 게 신기한데, 결정적으로 낙천적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2008년 금융위기 때 제자들이 다 떠나 문 닫을 위기도 있었는데, 그때도 그냥 버티니까 버텨지더군요.”

낙천적인 김 대표와 달리 조성호는 악바리다. 2006년 홍대앞 거리 버스킹 팀 ‘사운드박스’를 거쳐 김 대표의 제자로 입문했지만, 천부적인 재능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박치’에 가까웠다. “초반엔 선생님한테 많이 혼났죠. 기계적으로 열심히 하다보니 운동하듯 딱딱했거든요. 방학 때 잠시 배운 대학생들이 저보다 훨씬 잘하는 거예요. 저는 이걸로 먹고살려고 학교도 그만뒀으니, 그들보다 잘해야 했기에 이 악물고 할 수 밖에요.”(조)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 저는 별로 안 좋아해요. 적당히 즐겁게 했으면 좋겠는데 시험공부하듯 하길래 쉬엄쉬엄하라고 했었죠. 탭은 음악 틀어놓고 달리는 마라톤이거든요. 체력소모가 많아 다칠 수도 있어요.”(김)

맘에 쏙 드는 제자는 아니었지만, 일찍 독립한 똘똘한 제자다. 조성호가 쇼디렉터를 맡고 있는 클럽은 쇼의 인기 덕에 2주 전 예약해야 테이블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다. “옛날 재즈클럽 분위기의 공간이에요. 처음에 초청받아 갔는데, 어릴 때 흑백영화에서 보던 쇼가 생각나더군요. 그런 걸 여기서 하면 좋겠다 싶어서 레퍼토리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섰죠. 옛날 재즈클럽이 흑인들의 간절함을 토해내는 장소였던 것처럼 제게도 매일 간절함을 토해낼 장소가 필요했어요. 단순 플레이어를 넘어 다른 댄서들과 공유도 하고 싶은데, 내가 공연을 잡아야 동료들과 같이 할 수 있으니까요.”(조)

“공연이 뜨면서 클럽도 같이 떴어요. 전설의 탭댄서 중에 빌 보쟁글 로빈슨이라고 있는데, 백인·흑인 무대가 구별되던 세상에서 백인 무대에 선 최초의 흑인이자 1930년대 영화에서 백인 여자아이 손을 잡은 최초의 흑인이었거든요. 그도 후배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역사적인 인물이 탭댄서였던 것처럼, 우리도 역사를 만들어 가야겠죠.”(김)

이번 행사는 ‘국내 최초, 최대’ 탭댄스 페스티벌을 표방한다. 하루짜리 아마추어들의 축제는 간혹 있었지만 3일 동안 프로 탭댄서가 총출동하는 페스티벌은 없었다. “이번에 40~50명이 모여요. 스승님의 초창기 제자부터 저와 같이 배웠던 선후배 탭댄서들이 무대에서 만나는 자리라 정말 축제 기분이죠.”(조) “탭댄스와 마포는 떼놓을 수 없어요. 한국에 탭댄스 연습실, 아카데미, 학원이 15개라면 마포에 10개가 넘죠. ‘탭댄스의 메카’인 마포에서 장기적으로 페스티벌을 이어가려고 해요.”(김)

탭댄스의 메카 마포에 연습실·학원 몰려

단순한 갈라 형식의 춤공연을 넘어 김길태의 ‘탭쇼’, 조성호의 ‘골든에이지’ 확장판 등, 프로들이 저마다 색깔이 뚜렷한 쇼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의미도 남다르다. 다양한 쇼 레퍼토리 개발이 지금 탭댄스계의 화두기 때문이다. “그간 1세대로서 낯선 장르를 소개하는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 ‘인싸 오브 인싸’ 조성호씨처럼 탭댄서들이 많이 컸거든요. 대중에게 다가가는 접점을 다양하고 실험적인 쇼로 펼쳐볼 때가 온거죠. 장기적으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 모델입니다. 제자 키우는 것 다음으로 10년 이상 롱런한 ‘탭쇼’를 만들었다는 것이 제 자부심인 것처럼, 후배들에게도 동기부여를 해주고 싶어요.”(김)

“제가 아들이 둘 있는데, 다른 공연은 10분이면 싫증 내고 나가거든요. 끝까지 본 건 선생님의 탭쇼밖에 없죠. 그만큼 대중적이고 재밌게 만드셨어요.”(조) “차로 치면 ‘탭쇼’는 엔트리 카인 티코, 성호씨의 ‘골든에이지’는 벤츠죠. 1세대로서의 책임으로 그런 공연을 만든 겁니다. 제가 첨부터 멋부렸다면 아무도 안 보러왔을 거예요. 멋있는 건 앞으로 후배들이 만들어야죠. 내년엔 여성들만의 탭댄스쇼도 생각할 수 있고, 후배들 실험을 돕고 싶어요.”(김)

그렇다면 ‘사람을 미치게 하는 탭댄스의 마력’은 뭘까. ‘스윙키즈’ 오합지졸 댄스팀이 인종·성별·국경·이념을 넘어 하나가 됐던 건 아마도 보는 이의 가슴까지 격하게 뛰게 하는 소리 때문 아닐까. “‘리듬, 심장의 웃음소리’란 게 ‘탭쇼’의 첫 모토였죠. 단지 춤이 아니라 소리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힘이 분명 있어요.”(김) “소리가 난다는 건 소통이거든요. 악기 합주나 대화처럼 탭댄스도 커뮤니케이션이에요. 재즈밴드 안에서도 악기보다 더 앞장서서 관객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탭퍼들이죠. 결국 소통이 매력인 것 같아요.”(조)

그래서일까. 촬영을 위해 포즈를 요구하니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탭슈즈 몇 번 굴리더니 기막힌 점프를 동시에 구사했다. ‘스윙키즈’ 엔딩의 배틀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달까. “그걸 ‘챌린지’라고 하죠. 내가 너한테 도전한다는 뜻이에요. 우리 둘이 하면 어떻게 되냐구요? 제가 바로 꼬리 내리고 기권해야죠.(웃음)”(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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