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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부른 교가 ‘친일 음악가’ 논란 “애국가도 바꾸나”

중앙일보

입력

'친일인명사전' 등재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작곡가 안익태. 그는 애국가를 작곡했다. [중앙포토]

'친일인명사전' 등재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작곡가 안익태. 그는 애국가를 작곡했다. [중앙포토]

"푸른하늘 푸른바다 바라보면서/푸른잔디 위에서 자라는 우리 ...
창창하다 우리학교 배우는 동무/영광일세 우리학교 빛나는 역사"

  인천시 동구에 위치한 창영초의 교가다. 이 곳은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1907년 개교)이자 인천 3·1운동의 발상지다. 1919년 3월 6일 이 학교 3학년 김명진 군 등 3·4학년 학생 25명이 동맹 휴교를 하고 만세운동을 벌여 전원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만세 운동은 인천 곳곳으로 퍼졌다.

  그런데 최근 이 학교의 교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교가를 작곡한 임동혁(1912~?)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충성하자'는 내용의 군국가요를 다수 만들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기 때문이다. 창영초 관계자는 "교가를 친일 작곡가가 만든 것으로 확인된 만큼 동문회 등의 의견을 청취해 교가를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 창영초등학교 교가 [사진 창영초 홈페이지 화면 캡처]

인천 창영초등학교 교가 [사진 창영초 홈페이지 화면 캡처]

  학교에서 수십년간 불러온 교가가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역사가 오래된 학교의 교가를 친일 인사들이 만든 것으로 최근 알려지면서 해당 학교와 소속 교육청 등이 변경을 추진하고 나섰다. 그러나 단순히 교가를 만든 사람의 '친일' 행적만으로 오랫동안 사용해온 교가를 바꾸는 것이 옳은 일이냐는 지적도 나온다.

  인천시교육청은 28일 창영초처럼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가 더 있는지 관내 학교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교육청 김종해 장학사는 "교가가 친일 인사가 만든 곡으로 확인되면 내부 검토를 거쳐 개선하도록 권고할 예정"이라며 "다음 달 초 모든 초중고교에 공문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전북의 경우도 지난해 도교육청이 관내 모든 초중고교를 조사해보니 25개 학교가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도교육청은 각 학교에 교가를 바꿀 것을 권고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엔 17곳, 충북은 19곳, 충남은 20곳에서 친일 인사가 지은 교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 [중앙포토]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 [중앙포토]

  서울에서는 100곳이 넘었다. 지난 26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113곳이었다. 영훈초, 동산초, 단대부중·고, 휘문중·고 등 역사가 오랜 명문학교들이 주로 포함됐다.

 동작구의 성남중·고교는 교가를 친일 인사가 지은 것은 아니지만 가사에 친일인사인 설립자 원윤수와 김석원을 찬양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강산에 원석 두님 나셔서 배움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라는 부분이다. '먼동이 트이니 온누리가 환하도다'는 구절이 욱일승천기를 연상시킨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다만 서울시교육청은 다른 지역과 달리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김현철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은 "누가봐도 명백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함께 의논해서 친일의 상징물을 없애는 게 맞다"면서도 "일괄적인 기준을 갖고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교가도 전통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학교 구성원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율에 맡길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흥렬. [중앙포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흥렬. [중앙포토]

 그러나 '친일 노래'의 논란은 학교를 너머 지자체로도 확산 중이다. '삼각산 솟은 아래 고을고을이'로 시작하는 경기도 도가(道歌) 역시 변경을 검토 중이다. 노래를 작곡한 이홍렬(1909~1980)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기 때문이다. '섬집 아기' 등으로 유명한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음악 단체인 대화악단과 경성 후생악단에서 활동했다.

 이흥렬은 경기도 수원·평택·안성시 노래도 만들었다. 의정부·안양·동두천·안산·고양·오산·포천·여주시 노래는 김동진(1913~2009)이 지었다. 가곡 '가고파'를 작곡하고 가극 '심청전' 등을 발표한 김동진은 일본의 만주국 건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들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현재 고양시와 여주시는 즉각 노래 사용을 중단했다. 시민 공론화 작업을 거쳐 새로운 시가를 만들 예정이다. 고윤남 고양시 언론홍보팀장은 "시(市)로 승격한 199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며 "친일 음악인이 작곡한 것으로 확인된 만큼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차원에서 노래 사용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친일 인사가 만든 노래라고 해서 무조건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옳으냐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역사가 오랜 전통의 명문 학교일수록 이런 갈등이 많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가사를 붙이고, 유명 작곡가가 곡을 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06년 개교한 휘문고는 최남선이, 올해 개교 100주년인 전주고는 서정주가 가사를 썼다.

  익명을 요청한 서울의 한 고교 교장은 "아직 논란이 끝나지 않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만으로 그 사람의 작품까지 문제삼는 것은 잘못"이라며 "그런 논리라면 어릴 때부터 우리 귀에 익숙한 수 많은 동요들과 애국가까지 못 쓰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 지자체 관계자도 "친일 논란이 있는 부분은 명백하게 규명하는 게 옳지만, 그들의 작품은 작품대로 인정해주는 게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윤석만·최모란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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