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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의 직격 인터뷰

“3·1운동은 억압에 대한 세계사적 비폭력 저항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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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에레즈 마넬라 하버드대 석좌교수

오늘은 삼일절이다. 기쁜 날이다. 3·1운동 100주년이다. 매년 맞이하는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축일(祝日)이다. 3월 1일이 매년 경사스러운 이유는 100년 전, 온 민족이 일치단결한 그 날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대략 3·1운동을 기점으로 우리는 오른쪽과 왼쪽,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좌파와 우파는 서로 갈등하면서도 각자 줄기차게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했다. 결국 우리 민족은 벅찬 가슴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3·1운동에 영향 준 자결 개념 #유럽 사회주의 논의에서 탄생 #볼셰비키와 윌슨 대통령 수용 #한국엔 윌슨이 더 큰 영향 끼쳐 #간디의 ‘무저항·불복종’은 유명 #‘독립선언 33인’ 세계에 홍보해야 #과거사 솔직히 인정하는 일본 #그게 일본 자신에게도 좋을 것

삼일절이 광복절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남북이 다시 하나 된, 통일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8월 15일이 아니라, 1919년 3월 1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3·1운동은 대한민국 건국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년 전 함성의 그날은 우리의 뇌리에서 가물가물한 날이기도 하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

집단 무의식 속으로 침잠한 삼일절을 의식의 세계로 다시 불러올리기 위해, 그리고 3·1운동이 우리 민족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위해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과 미래융합연구원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가 25, 26일 양일에 걸쳐 ‘민주공화 100년, 세계시민 100년: 보편평화를 향하여’를 주제로 3·1운동 100주년 특별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했다.

마넬라 교수는 21세기 민족자결의 의미를 이렇게 본다. ’세계화가 국내 체제를 위협한다는 면에서 민족자결과 충돌하지만,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가치를 세계에 확산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마넬라 교수는 21세기 민족자결의 의미를 이렇게 본다. ’세계화가 국내 체제를 위협한다는 면에서 민족자결과 충돌하지만,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가치를 세계에 확산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이번 학술대회에 에레즈 마넬라(Erez Manela) 하버드대 교수가 ‘지구적 관점으로 본 3·1운동’이라는 주제로 참석했다. 3·1운동의 국제성·세계성에 대한 마넬라 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5·4운동에 가담한 중국 지식인과 학생들은 3·1운동을 명시적으로 거론했다. 그들은 한국 상황을 면밀히 주시했다. 마오쩌둥도 1919년 여름에 3·1운동에 대해 논하는 글을 남겼다. 인도나 이집트의 경우에는 3·1운동이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한국 상황을 심층적으로 따져 본 흔적은 없다. 3·1운동이 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마넬라 교수는 3·1운동에 영향을 준 민족자결 개념의 배경을 이렇게 정리한다. “민족자결은 중부·동부 유럽의 사회주의 논의에서 발생했고 러시아 혁명의 볼셰비키파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개념을 차용했다. 그러나 윌슨은 서구의 정치적·사상적 전통 선상에서 민족자결을 이해했다.” 마넬라 교수를 ‘민주공화 100년, 세계시민 100년’ 행사장에서 인터뷰했다.

3·1운동과 미국혁명을 같은 역사적 연장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3·1운동을 미국혁명과 연계했다. 이승만과 서재필은 제1차 한인대회(1919년 4월 19일)의 장소로 필라델피아를 선택했다. 미국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인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한인대회 참가자들은 대륙회의와 제헌회의가 열렸던 미국 독립기념관으로 행진했다. 이승만은 독립기념관에 있는,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은 매우 유명하다.”
미국혁명에 가담한 미국인들은 총을 들었다. 3·1운동은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왜 그런 차이가 났는가.
“상황이 달랐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영국의 미국 지배보다 훨씬 엄혹했다. 미국 주둔 영국군은 그 숫자가 많지 않았고 서로 떨어져 있었다. 한국인들은 무기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적인 시위는 선택의 산물이자 동시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천도교·개신교·불교 지도자들의 합작이 3·1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세속화에 따라 3·1운동의 종교적 성격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3·1운동의 전체적인 성격이 종교적은 아니더라도, 3·1운동에 등장한 많은 수사(rhetoric)은 종교적이었다. 특히 미국 내 상당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의 활동이 ‘크리스천 프로젝트(Christian project)’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그들은 한국의 기독교와 일본의 ‘이교(異敎· paganism)’를 대비시키며 미국인들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와 개혁·근대화 운동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3·1운동에 영향을 준 자결(自決·self-determination)은 오늘날에도 신선한 개념인지도 모른다. 자결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나 티베트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자결은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다루기 힘든(slippery) 개념이다. 자결은 누가 ‘자(自·self)’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세력마다 ‘셀프’를 자신의 입맛에 따라 사용한다. 그래서 브렉시트의 경우, 셀프는 유럽인일 수도 있고 영국인일 수도 있고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인·아일랜드인일 수도 있다. 티베트의 경우에도 중국인과 티베트 사람의 셀프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자결은 무수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자결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프로젝트의 당사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화는 많은 사람을 빈곤으로부터 해방했다. 하지만 희생자도 나왔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찍은 미국인들은 일종의 자결을 바란 게 아닐까.
“미국의 최근 정치에 자결 개념이 등장한 적은 없다. 트럼프가 사용하는 개념은 ‘민족주의’다. 그는 ‘나는 민족주의자다’라고 말한다.”
자결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정치 세력은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이다. 자결 개념을 ‘훔친’ 우드로 윌슨이 러시아 혁명보다 3·1운동에 더 큰 영향을 미쳤는가.
“내가 보기에는 국내·국외 3·1운동의 지도자들은 의미 있는 정도로 볼셰비키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러시아혁명은 기회 구조의 변화라는 차원에서 3·1운동에 기여했다. 1920년 이후에는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주의자들이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귀하의 『윌슨주의적 순간』은 3·1운동을 이집트·인도·중국 사례와 비교했다. 한국 사례의 특징은.
“네 사례 중에서 3·1운동이 가장 명확한 ‘반식민 저항 운동’ 사례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일원화되고 억압적인 지배였다. 한국인의 참여권이나 대의권이 없었다.”
3·1운동은 세계사적 사건이지만, 국제사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세계의 남쪽(Global South)’, 즉 제3세계에 3·1운동을  ‘반식민 저항 운동’이라는 점에서 홍보할 필요가 있을까.
“이번 연세대 행사가 바로 그런 차원에서 개최됐다. 3·1운동의 현재적·세계사적 의미를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3·1운동에는 한국이나 ‘글로벌 사우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3·1운동의 메시지는 ‘억압에 대한 비폭력인 저항’이다. 많은 세계인이 간디를 안다. 간디는 사실 1919년에 그가 펼친 ‘무저항·불복종 운동’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세계가 (민족 대표) 33인의 메시지(독립선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미국과 영국이 서로 가장 가까운 동맹이듯이, 한국과 일본도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 3·1운동을 전 세계에 홍보한다면, 한·일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지금이 일본이 자국의 역사에 대해, 특히 한·일관계사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 될 적절한 시점이라고 본다. 세계는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게 일본인들 자신에게도 좋다고 생각한다.”
‘보다 개방적(open)’이라는 말은 일본이 과거 역사에 대해 정직해지라는 뜻인가.
“물론 그렇다. 일본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폭력에 대해 보다 솔직담백하게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일본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노력해왔다. 하지만 일본은 그 방향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또 일본의 교육과정은 역사를 국민에게 보다 솔직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번 ‘민주공화 100년, 세계시민 100년’ 발표문에서 3·1운동의 젠더(gender) 차원을 강조했는데.
“1919년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이집트·인도에서 분출한 운동은 전통적인 남녀 간 규범과 관계에 도전을 제기했다. 아직 여성은 남성과 완벽히 평등하게 시위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19년 운동을 계기로 여성은 공공 영역에서 보다 큰 역할을 요구했다.”
이번 발표문은 3·1운동에 “초국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해외 활동가들이 참여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여기서 ‘해외 활동가’는 외국인이 아니라 해외에서 활동한 한국인을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하지만 미국인과 캐나다인들도 3·1운동을 지지했다. 그들은 특히 선교사이거나 선교기관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이 자행한 고문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압제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귀하는 『발전의 세기』(2018)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한국의 발전 체험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의 발전 모델은 지극히 흥미롭다. 한국은 매우 열악한 경제 상황에서 출발했지만, 각종 발전 지표의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또한 한국·대만 그리고 한두 사례는 민주화 모델에서 매우 중요하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민주화 모델이 중국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할 말이 있다면.
“한국의 지도자들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역사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차원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에레즈 마넬라 교수는…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국제사·미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주저로는 『제국들의 전쟁, 1911~1923』(2014), 『윌슨주의적 순간: 민족자결과 반식민 민족주의의 국제적 기원』(2007) 등이 있다.

김환영 중앙일보PLUS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