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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감시망 뚫고 "만세"···또 다른 '유관순'들 많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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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때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동료 60여명으로 모아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김숙자(1894~1979) 여사의 모습 [중앙포토]

1919년 3.1운동 때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동료 60여명으로 모아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김숙자(1894~1979) 여사의 모습 [중앙포토]

"불의코 백년 살지 말고 의코 하루 살아라"

김숙자 여사,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만세 운동 #일제에 의해 체포돼 '독립운동의 거괴'로 불리기도 #

'화장실 벽에 기록한 이 문구를 보기 위해 학생이 한명씩 들어온다. 오후 1시쯤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 소리가 들려오자 학생들은 책보를 던지고 기숙사 후문 열쇠를 주먹으로 비튼 뒤 달려나간다.'

독립신문에 1919년 9월 27일자 14호부터 21호까지 실린 '여학생일기'라는 연재 글 내용이다. 이 연재물은 '심원'이라는 여학생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중·경기여고)에 들어가 3.1운동에 참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1919년 10월 16일 독립신문에 연재된 ‘여학생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진]

1919년 10월 16일 독립신문에 연재된 ‘여학생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진]

실제로 3.1운동에선 여성이 주체적으로 참여했다. 수많은 여성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유관순 열사 외에 국민에게 알려진 인물은 드물다. 김숙자 여사(1894~1979)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그의 남편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역사학자 장도빈 선생이고 아들은 장치혁(87) 전 고합그룹 회장이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와 그의 가족에 따르면 김 여사는 1919년 3월 1일 관립 학교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동료 60여명을 이끌고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1912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교사로 일한 적 있던 그는 1916년 경성여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나이가 많고 리더십이 있던 그를 학교 친구들은 '왕언니'로 불렀다고 한다.

1908년 설립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당시 유일한 관립 여학교로 총독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조선인 교사가 많은 사립 여학교와 달리 교사도 대부분이 일본사람이었다. 김 여사는 취침시간에 몰래 태극기를 그렸다고 한다.

이후 매일 밤 몰래 그린 300장의 태극기를 들고 김씨는 3월 1일을 맞았다. 오전 11시쯤 기숙사 담장을 넘어 날아온 독립선언서 200장을 교사 몰래 숨겨 60명의 동지와 돌려 읽었다. 한국 최초의 여자 신문기자 최은희, 수원지역 대표 독립운동가 이선경도 함께였다. 김씨와 기숙사생 60여명은 시간에 맞춰 뒷문으로 내달려 종로2가-시청앞 광장-서대문을 누비며 만세를 외쳤다.

박환 교수는 "이화·숙명·정신여자고등보통학교 등 사립 여학교도 3.1운동에 참여했지만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관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관립학교는 일본에 유학을 가도 학력을 인정받는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다. 사립학교는 학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박 교수는 "이런 집단에서조차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을 보면 일본의 차별과 억압이 사회 구석구석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921년 6월 24일 자 매일신보. 제목에 "여성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 거괴 김숙자"라고 적혀 있다. [제공 고려학술문화재단]

1921년 6월 24일 자 매일신보. 제목에 "여성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 거괴 김숙자"라고 적혀 있다. [제공 고려학술문화재단]

3.1운동 이후 김씨는 고향인 평안북도로 내려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 자에는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의 거괴 김숙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대한애국부인회에 가입해 평안북도 조직책으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으던 김씨가 체포됐다는 내용이다. 체포될 당시 그는 임신 7개월이었다.

박 교수는 “과거 여성은 자신의 공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컸다. 김 여사의 동생 김응원 선생 역시 임시정부 국내 조직인 연통제 책임자로 의열단에서도 활동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지만, 김 여사는 훈장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관심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더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태윤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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