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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배치는 권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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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7월 수아송(Soissons)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 진지를 돌파한다. 공세에는 408대의 ‘르노 FT-17’ 전차가 앞장섰다. 전투는 공격과 방어로 이루어진다. 공격이 우세하면 기동전이 전개되고, 방어가 압도하면 진지전으로 돈좌된다. 제1차 세계대전은 대표적인 진지전이었으며, 그 주역은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기관총이었다. 그리하여 지루한 참호전이 이어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 바로 전차였다. 최초로 전차를 만든 것은 영국이었다.

합리적 모더니즘 또는 즉흥성 #서구 디자인 꿰뚫는 양대 전통 #한국 디자인은 자기논리보다는 #국가·자본의 요구에만 이끌려 #권력 행사의 장치로 머물고 있어

영국의 ‘마크 I’ 전차는 차체 양옆에 기관총과 대포를 장비한 고슴도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크 I 전차는 무한궤도를 이용하여 독일군 참호를 넘을 수는 있었지만 사격 범위가 좁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것이 바로 프랑스군의 신무기 ‘르노’ 전차였다. 르노 전차는 차체 위에 선회포탑(turret)을 올리고 거기에 무장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사각(死角) 없이 360도로 기관총과 대포를 쏘아댈 수 있었다. 르노 전차는 이후 전차 레이아웃(lay out)의 원형이 되었다. 세계 최초로 전차를 발명한 것은 영국이지만, 현대 전차의 표준을 완성한 것은 프랑스였다.

마크 I 전차와 르노 전차의 차이는 레이아웃의 차이이다. 레이아웃이란 배치이다. 사전에는 통상 레이아웃을 “광고나 편집, 인쇄 등에서 문자, 그림, 기호, 사진 등을 시각적 효과와 사용 목적을 고려하여 제한된 공간 안에 효과적으로 구성하고 배열하는 일, 또는 그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사물을 공간에 구성하는 것, 그것은 곧 권력이다. 미셸 푸코는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행사되는 것이고, 점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배치하고 조작하는 기술과 기능에 의해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권력은 배치를 통해 행사되는데, 배치가 지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짐은 말할 것도 없다.

공간과 사물을 배치하는 디자인은 그 자체가 권력 행위다. 재구조화 논란이 뜨거운 광화문 광장. 여기에는 어떤 권력의 요구가 작용하고 있을까. [뉴시스]

공간과 사물을 배치하는 디자인은 그 자체가 권력 행위다. 재구조화 논란이 뜨거운 광화문 광장. 여기에는 어떤 권력의 요구가 작용하고 있을까. [뉴시스]

근대 인식론은 크게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로 나뉜다. 경험주의는 인간의 지식은 오로지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만이 진정한 인식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경험주의는 우리의 관념이 기본적으로 개별적 경험에 의존하며, 총합적 지식이란 그러한 관념의 연합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합리주의는 이성에 의한 주체의 사유라는 중심 없이는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경험주의적으로 보면 주체는 관념의 다발이지만, 합리주의적으로 보면 주체는 인식의 중심이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둘을 종합하여 선험철학을 완성한다.

차체 바깥에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온 대포와 기관총의 다발로 무장한 마크 I 전차가 경험주의적이라면, 차체 한가운데에 선회포탑을 장착한 르노 전차는 합리주의적이다. 그래서 르노 전차는 파놉티콘(panopticon)이기도 하다. 파놉티콘은 원래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덤이 말한 것인데,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예로 들면서 유명해진 개념이다. 그것은 방사형의 감방에 갇힌 죄수들을 중앙에 위치한 간수가 360도로 감시하는 원형감옥으로서, 최소한의 감시자가 최대한의 수감자를 통제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구조이다. 르노 전차의 선회포탑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물론 그 파놉티콘의 가운데에 있는 것은 데카르트가 말한 ‘코기토(cogito)’,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할 때의 그 사유하는 주체이다. 그러니까 근대적 주체는 이성이라는 하나의 중심과 퍼스펙티브를 가진다. 다만 주체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주체는 시선을 매개로 한 배치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에서는 마크 I 전차의 방식을 ‘애드호키즘(Adhocism)’이라고 부른다. 전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임시변통이자 즉흥성인데, 어떤 상황에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답을 찾아 나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애드호키즘의 반대는 ‘모던 디자인(Modern Design)’이다. 모던 디자인이란 특정한 형태나 이념 같은 선험적 원리로부터 도출된 방법에 따라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모던 디자인은 합리주의 디자인인 것이다. 올해 설립 백주년을 맞는 ‘바우하우스’가 그 대표주자이다. 물론 오늘날 포스트모던한 상황에서는 모던 디자인의 합리주의가 일원론적 폭력이라고 비판받고, 애드호키즘의 즉흥성과 유연성이야말로 현실적이라면서 재조명되는, 또 다른 반전이 목도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국 디자인에는 애초 모던 디자인과 같은 선험적 원리나 합리주의가 존재해본 적이 없다. 한국 디자인은 언제나 경험적인, 너무나 경험적인 권력, 즉 국가와 자본을 주체로 삼아왔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디자인은 자기 논리를 갖지 못하고 언제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변통의 상태에 머무를 뿐이다. 그런데 디자인의 사회적 차원은 앞서 언급한 레이아웃, 즉 배치를 통해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디자인 역시 시선을 매개로 한 배치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논란이 되는 광화문 광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광화문 광장의 배치에 드러나는 시선의 권력과 그 주체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