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시조 백일장] 2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장원>

빈집  
-강병국

적막이 무서운가
직박구리
섧게 운다

기억의 뒷모습 잔잔히 걸어 나와

댓돌에
침묵으로 앉아
시간 속을 더듬는다

바람에 출렁이는
주인 잃은
해바라기

삭아 내린 철제 대문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스름
그렁한 눈빛
고요 속에 잠들고

◆강병국

강병국

강병국

경상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사)푸른우포사람들 부회장. 저서로 과학도서 『우포늪』 『순천만』 『한국의 늪』 등.

<차상>

너머를 본다  
-황혜리

안경을 맞추는데 퍽이나 근시라니
멀리 봐야 하는 일도 동동대고 맘 졸이고
코앞에 닥쳐야지만 그제야 눈치 채는

그 너머의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안경을 고쳐 쓰며 먼 곳을 바라본다
우리가 약속한 것들 기다리고 있을까

<차하>

콘센트
-정상미

오목한 몸에선
결핍의 냄새가 나요
바람은 서늘한 내 몸을 읽어내고
깊어진 구멍 속에서 살결을 갉아 먹어요

젖은 몸으로 성급하게
다가오지 마세요
목마른 우리는 녹아내리고 말 거에요
천천히 들어오세요 놓지 않을 거에요

하루에 몇 번이나
우리가 될 수 있는지
파트너를 바꿔가며 타보는 구름 기차
이제는 빼도 좋아요 전기밥솥 플러그

<이달의 심사평> 

새해를 시작한 기운이 충만해서인지 이달의 응모 작품들은 내용이 풍성했다. 응모 편수도 많고 질적 수준도 높았다. 응모자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어르고 달래가며 시조의 독창적인 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돋보였다. 이번 달에는 대체로 일상적 삶의 다양한 시선을 통해 얻어지는 깊은 사유가 깃들어 있는 작품에 주목했다. 이들의 작품은 우리 삶의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사색을 보여주고 있다.

장원으로 뽑힌 강병국의 ‘빈집’은 주인이 떠난 빈집의 적막하고 스산한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한때 따듯하고 정겹게 살았을 가족들의 애환이 얽혀있는 “댓돌”이나 “삭은 철제 대문”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진한 여운이 맴도는 빈집의 “시간 속을 더듬어”서 “직박구리의 설운 울음”을 짚어내는 솜씨가 비범하다.

차상에 오른 황혜리의 ‘너머를 본다’는 안경이 상징하는 생의 탐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누구라도 “멀리 봐야 하는 일도 동동대고 맘 졸이”지만 “안경을 고쳐 쓰”고 그 너머를 상상해 보는 일은 독자들의 공감과 사유의 폭을 확대시켜 주고 있다. 차하로는 정상미의 ‘콘센트’를 선한다. 현실적 삶에서 얻어진 지혜와 쉬운 입말을 통해 시상을 유머러스하게 전개하는 솜씨에 눈길이 갔다. 다만, 대체로 작품이 다소 늘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므로 내용을 좀 더 다져보면 좋겠다.

끝까지 남아 좀 더 깊이 논의한 작품 중에는 조우리, 유영희, 조긍, 황남희, 강하나, 최종천 등의 작품이 있었다.

심사위원: 염창권·김삼환(대표집필 김삼환)

<초대시조>

세 마디
-김미정

숨은 뜻은 모르는데 말은 늘 아끼시던
어, 하고 전화 받고
그래, 한 번 끄덕이고
끊어라, 하며 휘갑치는
굵고 짧은
세 마디

지상의 오랜 시간 아버지가 남기신 말
기억은 울림이 되어
행간을 넓혀가네
속귀에 녹아내리는
무뚝뚝한
세 마디

◆김미정

김미정

김미정

경북 영천 출생.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 시조집『고요한 둘레』 『더듬이를 세우다』 현대시조 100인 시선집 『곁』. 제5회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지상의 모든 아버지는 노거수다. 산마루에 우뚝 선 작은 영웅이다. 아버지의 존재란 혼자 걸어가지 않고 한 많은 세상을 이끌고 간다.

그래서 몸속엔 옹이가 많다. 옹이는 세상의 소리를 듣고 지켜보는 말 없는 눈이다. 그 “숨은 뜻”을 자식은 모른다. 늘 자신의 말은 뒷전으로 아끼기 때문이다. “끊어라”는 마지막 말은 단호한 절벽 같지만 아버지는 다 듣고서도 끝까지 속내를 말하지 않는 까닭이다. 옳고 그른 것은 알지만 함부로 좋고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버지의 귓속이 깊기 때문이다.

“속귀”란 내이(內耳)의 다른 이름이다. 불필요한 말들을 외이 중이에서 다 걸러내고 꼭 필요한 말만 듣는 귀다. 무뚝뚝하지만 굵고 짧은 세 마디가 아니었으면 외이에서 바람과 함께 흘러가 사라지고 속귀에 녹아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인은 부모는 천년수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곧 내리사랑이고 말 없음의 사랑 아니랴. 단 세 마디의 말 속에 “기억의 울림”이 “행간을 넓혀가”는 걸 보면 참 어지간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나 보다. 그러나 잊지 마시라. 미운 자식 밥 한술 더 떠먹이던 우리 부모님의 새끼손가락 아리던 정을. 한 시대의 아버지는 그 사회의 기둥이었다. 오로지 한 가정을 위한 버팀목으로 자식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서사만 있고 자신의 불행을 피해 갈 우회로가 없는 천치 같은 낮달이었다. 지금도 아버지는 저기 계시지 않고 여기 계신다. 바로 여기 아름드리 우람한 노거수로 서 계시면서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최영효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또는 e메일(won.minji@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89.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