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혐오, 부끄러움. 요즘 되뇌는 말이다. 올해 들어 몇번이나 새벽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지 모르겠다. 세기 어렵다.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이불킥’ 장면들이 쌓였다.
올해만의 일도 아니긴 하다. 삶이 쌓여 갈수록, 부끄러움도 쌓여 간다. 지혜, 성과, 뿌듯함, ‘텅장’의 잔고까지 모두 채워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할 뿐인데, 내 부끄러움의 값은 내내 우상향의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꿈꾸던 멋진 어른에서 멀어지는 것도, 분노를 느낀 부당함과 알게 모르게 타협하는 것도, 스스로 또 다른 부당함을 낳고 있는 것도, 한심한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것도. 새벽이면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으로 되돌아온다.
이처럼 부끄러운 일 투성이지만, 가끔은 부끄러움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잘못이 많지만 적어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이란 사실이 작은 위안을 주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하루를 견디고 더 나은 하루를 살아갈 힘이 된다. 부끄러움이 주는 고통과 불안을 알기에.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미약하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려 애쓰게 된다.
만약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지경까지 이르면, 아마 희망마저도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이런 상태에 놓인 이들을 ‘파렴치한’이라 한다. 파렴치한이 되면 스스로 나아질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기에 잘못의 탓도 항상 바깥으로만 향한다.
파렴치한이 세상에 흔치는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뉴스로는 매일 접한다.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리며 일군 민주주의와 그 고통의 과정을 모욕하는 이, 유치원 비리로 부모들의 불신이 하늘을 찌르는데 ‘좌파교육 탓’ 운운하며 색깔론이나 펴는 이들이 당장 떠오른다. 그 외에도 물론 많다.
그들에게, 부끄러움 하면 먼저 떠오르는 시를 권한다. 이맘때가 되면 떠오르는 시인이기도 하고, 그의 삶과 작품을 곱씹으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해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시인 ‘쉽게 쓰여진 시’)
모두 알듯, 그는 특별히 잘못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 점 부끄럼도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 고귀한 삶과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매 순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했다.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을 꾸짖듯. 참고로 ‘5·18 망언’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16일은, 74년 전죄 없는 시인이 타국의 감옥에서 고통 속에 숨을 거둔 날이었다. 누군들 잘못이야 할 수밖에 없지만, 부끄러운 줄은 알고 살아야겠다.
윤정민 콘텐트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