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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학생·교수·직원 한마음 동참, 방방곡곡 누비며 “대한독립 만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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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3·1운동 100주년 기념 세브란스 독립운동사 

최근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TV 프로그램에선 도올 김용옥이 100년 전 작성된 ‘기미독립선언서’의 전문을 요즘 언어로 쉽게 풀이해 시청자의 공감을 샀다. 이처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의미·가치를 되새기는 작업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 당시 독립을 향한 국민적 열망을 되새기는 것이다. 지난 21일 연세대 의과대학과 세브란스병원도 학생·교수·직원 등 독립운동에 참여한 60여 명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열었다. 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공적을 살펴봤다.

한 달 전에 치밀한 계획 세워 #독립선언문 배포, 시위 주도 #의사·간호사는 부상자 치료

김건배 작가의 세브란스 역사 유화 ‘독립선언문을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 이 그림에서 엎드린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게 독립선언문이다.

김건배 작가의 세브란스 역사 유화 ‘독립선언문을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 이 그림에서 엎드린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게 독립선언문이다.

국가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세브란스인은 6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32명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 유공자로 포상받았다. 포상자 명단에는 의사(의대생 포함) 20명을 비롯해 간호사 7명, 교직원 5명이 포함됐다. 이는 세브란스의 다양한 직군에서 나라 찾기 운동에 참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들은 독립선언문을 전국에 배포하고 독립을 위해 각자 전문 분야를 살려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국권을 위해 힘쓴 세브란스인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는 건 단연 학생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19년 2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이하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은 세브란스병원의 제약주임인 이갑성의 집에 모인다. 이날 서울시내 각 전문학교 대표자 모임에 세브란스의전 학생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서울은 물론 경남 마산·함안 등 지역에 독립선언문을 전달하거나 만세 시위에 참가하는 등 기동력이 필요한 곳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모두 체포됐고 각각 징역 6개월에서 1년, 집행유예 3년 등을 선고받았다. 중심 역할을 한 김병수·배동석·송춘근·안상철 등은 이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활약

세브란스병원 직원 가운데 3·1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갑성·정태영·이일선이다. 이들은 삼일만세운동의 최전선에서 희생됐다고 전해진다.

세브란스 의전 전경.

세브란스 의전 전경.

적십자간호원양성소 1회 졸업생.

적십자간호원양성소 1회 졸업생.

특히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은 3·1운동을 위한 조직을 꾸리는 시작 단계부터 관여했다. 각 종교계의 합동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회의 장소를 제공했다. 나뉘어 있던 종교계와 학생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회계 직무를 맡았던 정태영은 1919년 3월 2일 오후 11시 서울 종로에 있는 보신각의 종을 난타하며 시민에게 독립선언을 공표했다. 이는 3·1운동의 시작을 국내외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받는다. 세브란스병원 방사선사였던 이일선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소식을 알리기 위해 신문을 발간·배포했다. 이들은 징역 7개월에서 2년6개월을 구형받았다. 이후 모두 독립운동 유공자에 이름을 올렸다.

간호사의 역할도 상당했다. 3월 5일 남대문정거장 앞에서 진행된 만세운동 현장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며 도움의 손길을 보탠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간호사 대부분이 ‘애국부인회’에 참여해 독립운동가의 옥바라지, 독립자금 모금 등 활동을 지속했다. 1919년 12월 2일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간호사 7명은 이후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외국인은 해외에 소식 전파

세브란스의전의 교수도 국권 되찾기에 적극 동참했다. 특히 교수이자 의료선교사로서 각지의 선교사와 긴밀하게 소통하던 샤록스(Alfred M. Sharrocks)와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는 당시 상황을 국내외로 확산시켰다. 샤록스는 보신각 종 난타 사건을 외국인에게 알릴 것을 당부하는 영문 인쇄물을 제작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스코필드는 사진·글로 독립운동을 기록해 전 세계에 알렸다. 특히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이 펼쳐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해외에 알렸다. 이들은 1968년 독립장 서훈을 받았다.

이처럼 세브란스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역사적으로 한 획을 그을 만큼 많이 활약했다.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연세의대 의사학과는 2년 전부터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 왔다.

우선 『세브란스 독립운동사』 『근대의학과 의사 독립운동 탐방기』라는 책을 펴내며 세브란스의 독립운동사를 종합적으로 정리·기록했다. 지난 21일엔 연세대 의과대학 종합관에서 ‘제중원 창립 134주년 및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 세브란스 독립운동사의 연구 성과를 공유했다. 장양수 연세대 의과대학장은 심포지엄에서 “다양한 직군의 구성원이 국가에 헌신했다”며 “독립운동에 참여해 의료인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세브란스인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신윤애 기자 shin.yunae@joongang.co.kr, 사진=세브란스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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