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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OUT]일본선 2015년 풀린 원격 진료, 한국선 20년째 가로 막혀

중앙일보

입력

규제 막혀 해외로 간 인성정보 원종윤 대표 인터뷰 

원종윤 인성정보 대표. 왕준열 기자

원종윤 인성정보 대표. 왕준열 기자

인성정보 원종윤(60) 대표는 2004년 어느 날 국내 고령화 현상 관련 기사를 읽다 무릎을 쳤다. 네트워크 장비 국내 유통업체로 1992년 설립한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던 차였다. 노인 인구와 만성 질환자가 늘어나는 추세에 대비하기 위해선 일상생활 관리를 도와줄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점에 착안한 원 대표는 그날로 디지털 헬스케어 부문 조직을 만들고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병원에 가지 않더라도 노인 만성질환자 건강을 원격적으로 관리해줄 수 있는 의료시스템 개발이 목표였다. 2020년이면 노인 인구가 80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청 인구 추계를 고려하면 국내 시장성은 충분해 보였다.
 그 후로 15년. 인성정보는 예상과는 다르게 디지털 헬스케어 국내 사업을 거의 포기했다. 대신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이집트 등 세계 30여 개국에 원격의료기기를 수출하는 등 해외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2017년엔 미국 보훈부(Veterans Affairs)에 원격의료 기기 '하이케어 허브'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하이케어 허브는 혈압계 등 80여개 의료기기로부터 측정한 생체정보를 수집해 의료진에게 보내줄 수 있는 장비다.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인성정보의 원격의료 사업 국내 비중은 70% 해외가 30%이었지만 지금은 국내 10% 해외 90%로 바뀌었다.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오금동 인성정보 본사에서 만난 원 대표는 국내 사업을 접고 해외로 나간 이유에 대해 “10년 넘게 규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디지털헬스케어 기업인 인성정보는 국내 규제로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해외 전시회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1월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에서 열린 의료기기 전시회에서 원격의료기기인 하이케어 허브를 출품한 인성정보 부스. [사진 인성정보]

디지털헬스케어 기업인 인성정보는 국내 규제로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해외 전시회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1월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에서 열린 의료기기 전시회에서 원격의료기기인 하이케어 허브를 출품한 인성정보 부스. [사진 인성정보]

왜 해외로 나갔나.
“의료법 34조는 의사-의사간 원격의료만 허용하고 있다. 의료인들이 서로 조언을 구하거나 의료 지식을 지원하는 형태만 가능하지, 외국처럼 의사-환자간 원격의료는 할 수 없다는 얘기다. 또 원격의료에 관련 대한 의료보험도 적용이 안 된다. 시범 사업만 십수년째 하는 상황에서 사업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규제가 풀리지 않는 원인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이를 잘 풀지 못하고 있다. 2010년에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국무회의까지 통과했는데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못 하고 폐기됐다. 다음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허용되면 불안한 집단이 있고 국회의원들이 이들을 의식해 법안 통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국내 사업을 못 해서 겪는 어려움은.
“원래 국내에서 성공모델을 만든 다음 해외로 진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해외로 나갔다. 그런데 헬스케어는 건강과 관련된 거라 해외에서도 보수적으로 평가한다. 우리 제품을 쓰도록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기존 실적인데 우리는 국내에선 시범사업 실적밖에 없었다. 시범사업은 해외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만한 제품이라 설득하는 데 힘이 들었다.”

실제 국내 원격의료는 2000년 강원도 16개 시ㆍ군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이 실시된 이래 2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이다.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는 외딴 섬이나 깊은 산속 같은 격오지, 군부대 등 의료 취약지에서만 시범사업만 일부 진행될 뿐이다. SK텔레콤, KT 등 통신 회사들이 대형 병원들과 함께 원격의료 사업에 의욕적으로 뛰어들었지만, 대부분 사업 부문을 축소한 상태에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점점 커지는 세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 규모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스태티스타]

점점 커지는 세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 규모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스태티스타]

네이버는 지난달 4일 일본 자회사인 라인과 일본 의료전문 플랫폼업체 M3의 합작법인인 라인헬스케어를 도쿄에 설립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월간 이용자 수(MAU) 7800만 명에 달하는 모바일 메신저 라인을 활용해 원격 의료 상담 및 처방 약 택배 서비스 등을 도입할 예정이다. 신체가 마비된 사람들이 집에서 재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라파엘 스마트 글러브’를 개발한 한국 스타트업 네오펙트도 미국 버지니아주에 해외 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다른 국내 업체들도 해외에서 원격의료 사업을 한다.
“일본 같은 경우 2015년 의료인과 환자 간 원격의료를 허용했다. 모바일과 스마트폰으로 진료를 본다. 고령화가 심각해지면서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려는 취지다. 심지어 약을 택배로 보내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 사회 구조가 바뀌는 만큼 규제도 사회 구조에 맞게 풀고 있다. 해외에선 규제가 풀리고 있으니, 기업들도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도 미국 시장에 진출해보니 국내보다 40배 넓은 시장이 있어서 활로를 찾았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의료계는 인터넷 뱅킹처럼 '인터넷 병원' 시대로 가는 추세다. 특히 중국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료 예약 및 결제, 건강 상담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온라인 약 처방도 지난해부터 허용하면서 본격적인 ‘인터넷 병원’ 시대를 맞고 있다. 실제 지난해 말 중앙일보가 찾은 중국 항저우 시내에 있는 모바일 헬스케어 기업인 DXY의 오프라인 병원에는 기다리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지난해 9월부터 만성질환자에 한해 모바일 처방전 발급이 허용된 덕분에 실제 방문하는 환자 수가 줄어든 것이다.

항저우 시내에 있는 DXY의 오프라인 병원 로비. 다른 공립병원과는 달리 원격의료로 처방받는 만성질환 환자들이 많아 기다리지 않고 진료를 받을 수 있다. 항저우=박민제 기자

항저우 시내에 있는 DXY의 오프라인 병원 로비. 다른 공립병원과는 달리 원격의료로 처방받는 만성질환 환자들이 많아 기다리지 않고 진료를 받을 수 있다. 항저우=박민제 기자

원 대표는 인터넷 병원 시대로 가고 있는 글로벌 상황에 한국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국내 의료 관련 규제도 바뀔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외국처럼 신사업의 경우 일단 허용한 뒤 문제가 생기면 규제를 만드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가야 새로운 사업이 클 수 있다”며 “원격 의료가 허용됐으면 좋겠지만 그게 현 상황에서 어렵다면 원격 의료 관련한 부분을 보험 급여에 포함해주는 등 가능한 부분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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