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밤이 외로운 홀어미가 욕망을 해결한 이야기 두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27)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의 영화, '미망인'.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과 좌절을 담아냈다. 영화는 1950년대 배경과 어떠한 형태로든 경제 활동을 시작한 한국여성의 삶을 첨예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사진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의 영화, '미망인'.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과 좌절을 담아냈다. 영화는 1950년대 배경과 어떠한 형태로든 경제 활동을 시작한 한국여성의 삶을 첨예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사진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

오늘은 과부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사실 호칭부터 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미망인(未亡人)’이라는 호칭이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어서 불편한 것처럼 ‘과부(寡婦)’는 ‘부족한 여자’라는 뜻이어서 그다지 달갑지 않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홀로 남은 여자는 마땅히 따라 죽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했기에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뭔가 부족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칭하는 표현에 비하의 의미가 담기는 것이 당연해진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고 싶다면 ‘과부’의 대가 되는 말인 ‘홀아비’를 떠올려 보자. 이는 그저 ‘홀로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 홀로 있어서 ‘아직’ 무엇을 하지 못했다거나 무언가 ‘갖추지 못함’을 의미하지는 않는 나름 균형감을 갖춘 표현이다. 이로부터 ‘과부’의 대안이 제시될 수 있겠다.

‘홀아비’의 대가 되는 표현으로서 ‘홀어미’라면 어느 정도 타협이 되지 않을까 한다.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고 홀어미는 은이 서 말”이라는 재미난 속담도 있다. 여자는 혼자 살 수 있지만 남자는 집안일을 보아 줄 사람이 없으면 살림이 군색하여진다는 뜻이다.

욕구에 당당했던 이야기 속 홀어미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변강쇠가 아닌 옹녀를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 옹녀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주체적으로 욕구를 표현하고, 해결한다. [사진 국립창극단]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변강쇠가 아닌 옹녀를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 옹녀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주체적으로 욕구를 표현하고, 해결한다. [사진 국립창극단]

옛날에 젊은 홀어미가 있었다. 엄청 부자여서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삼십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가던 총각이 하나 있었다. 이 총각은 그 홀어미를 잘 아는 동네 사람에게 부탁해 홀어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총각은 홀어미에게 자기 소원대로만 해주면 새경도 안 받고 몇 해든지 머슴을 살아주겠다고 했다. 홀어미가 그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총각은 밤마다 초 두 자루만 달라고 했다. 홀어미는 그거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하니 그러겠다고 말했다.

총각은 그날부터 저녁마다 머리를 감고 곱게 빗어 땋은 뒤 촛불을 방 양쪽에 환하게 켜 놓았다. 그러고는 방 한가운데 홀딱 벗고 누워 힘을 써서 연장을 세워 놓았다. 홀어미가 어느 날 ‘저 머슴이 뭘 하느라고 밤마다 저렇게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있나’ 궁금해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는데 총각이 그러고 누워 있는 것이었다.

“에그 고약하다!” 깜짝 놀란 홀어미는 자기 방에 도로 들어갔는데, 좀 전에 본 게 자꾸 떠올랐다.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고 애써도 잠도 오지 않고 괴로웠던 홀어미가 또 살며시 총각 방에 가보았는데, 총각은 여전히 그렇게 홀딱 벗은 채 누워 있었다. 홀어미는 또 놀라서 도로 갔다가 다시 총각 방을 찾아와서는 그만 총각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총각은 짐짓 놀라는 척하며 “아이, 왜 이러십니까. 얼른 나가셔요”하고 외쳤다. 그러면서 자기는 지금 농사 잘되라고 기도를 드리느라 이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홀어미는 “에이고 뭐, 농사 기도고, 뭐고, 고마 날 살려 달라”며 총각에게 덤볐다. 총각은 그렇게 홀어미에게 장가를 들어 그 살림을 맡아서는 큰기침 좀 하면서 잘 살았다고 한다.

조금 진한 이야기였다. 혹시 이런 이야기에서 남성이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가 느껴져 불편한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이야기는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각자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겠다.

뮤지컬 '레드북'의 1막 마지막 넘버의 제목은 여성 작가 안나가 부르는 '나는 야한 여자'이다. 안나는 여성의 욕구에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야한 소설을 쓰면서 파장을 일으킨다. 주체적으로 여성의 욕구를 표출하는 우리네 홀어미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사진은 뮤지컬 ‘레드북’ 대본과 악보, 소품들. [중앙포토]

뮤지컬 '레드북'의 1막 마지막 넘버의 제목은 여성 작가 안나가 부르는 '나는 야한 여자'이다. 안나는 여성의 욕구에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야한 소설을 쓰면서 파장을 일으킨다. 주체적으로 여성의 욕구를 표출하는 우리네 홀어미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사진은 뮤지컬 ‘레드북’ 대본과 악보, 소품들. [중앙포토]

혹시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홀어미의 욕망을 드러내는 이야기 한 편 더 소개한다. 옛날에 한 부자 홀어미가 있었다. 먼저 세상 떠난 남편이 남겨 놓은 유산을 부지런히 키우고 가꿔 먹고 사는 데엔 별걱정을 안 해도 되는 정도가 되었지만, 홀로 지낸 세월이 오래다 보니 이젠 좀 짝을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밤마다 바늘로 허벅지 찔러대다 허벅지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니 말이다.

하지만 홀어미는 잘못해서 변변찮은 남자를 만나면 기껏 일군 살림을 다 말아먹지나 않을지 걱정이었다. 자식을 또 낳고 키워야 할 일도 생각해 보니 아득했다. “에라, 결혼은 무슨….”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기도 했지만, 밤이 외로운 건 견디기 힘들었다. 홀어미는 급기야 윗동네 사는 앞 못 보는 영감을 떠올렸다. 홀어미는 일단 맘을 먹고 어느 날 밤에 몰래 그 영감을 찾아가 절박했던 문제를 해결했다.

홀어미는 이제 좀 홀가분해졌지만, 문제는 그날 이후 이 영감이 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밤에 분명 누군가 찾아와 뜨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눈이 어두워 누군지를 알 수가 없으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영감은 온 동네 집집이 찾아다니며 “하룻저녁 자고 말 것인가”하고 외치고 다녔다. 동네 사람들은 앞 못 보는 영감이 혼자 살더니 노망이 난 모양이라며 영감을 쫓아내기 바빴다.

영감이 그러다 홀어미 집까지 와서는 “하룻저녁 자고 말 것인가. 오늘 저녁은 안 오는가”하고 외쳤다. 자식들과 함께 방 안에 있던 홀어미는 “아이고 어쩌나. 어째 알고 저리 왔대냐”하고는 민망해하며 자식들에게 얼른 영감을 안으로 모시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영감이 입고 있던 옷을 싹 벗겨 목욕을 시켜 주고 좋은 옷을 골라 입혀 주고는 그날부터 자식들과 영감과 함께 아주 잘살았다.

에둘러 갈 것 뭐 있을까. 진정 원한다면 그저 달려들어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이나 절차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것도 어찌 보면 행운이고 복이다. 또 한편으로는 능력이기도 한 것 같다. 이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 특히 성적인 욕구에 대해 대놓고 표현하는 것을 억압하도록 요구한다.

그것이 특히 여성에게 더욱 구조적 억압으로 작용해 여성은 비자발적 불감증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왔다. 아무것도 느껴서는 안 되며, 느낀다고 표현해서는 더더욱 안 되었다. 그러나 남성의 욕구는 태생적으로 어찌할 수 없으니 여성이 받아들여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 요구받아 왔다.

건강한 욕구 해소에 투쟁적 시선 거둬야

서울시청에서 '2018 젠더거버넌스 한마당'이 열린 모습. 이날 '성평등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 '성평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등을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구시대 것의 잘못을 잡아나가면서도 우리 이야기 속의 성 담론을 세심하게 해석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연합뉴스]

서울시청에서 '2018 젠더거버넌스 한마당'이 열린 모습. 이날 '성평등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 '성평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등을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구시대 것의 잘못을 잡아나가면서도 우리 이야기 속의 성 담론을 세심하게 해석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연합뉴스]

위에 소개한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구에 집중했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선 자신감, 당당함, 솔직함이 애쓰지 않아도 배어 나온다. 일부러 머슴으로 들어가 홀어미를 유혹한 총각의 이야기에서도 총각이나 홀어미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 진정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화끈하게 돌진했다.

욕구 해소 방법을 찾다가 윗동네 영감을 스스로 찾아가는 홀어미도 마찬가지. 굳이 따지자면 장애 있는 사람을 자신의 욕구 해소에 이용한 것이니 이 홀어미의 행동에 윤리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서는 영감과 홀어미의 욕망이 서로 맞아떨어져, 외롭게 살던 두 사람이 함께 잘살게 되는 결말로 마무리됐다. 홀어미의 윤리 도덕적 행위를 문제 삼고자 했다면 이 이야기는 이러한 결말로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홀어미를 유혹하는 머슴 역시 재물을 얻을 생각에 저지른 일이니 그 동기가 불순하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둘이 잘사는 거로 마무리되었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 만약 그 뒷이야기에 결국 본색을 드러낸 머슴이 홀어미의 재산을 혼자 차지하고 홀어미를 내치거나 심지어 죽이거나 한다면 그때는 이야기의 주제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 사는 세상의 거의 모든 당연했던 사고, 가치관들이 끊임없이 의심되는 세상이다. 그러면서 이 시대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건강한 서사가 필요한 것 같다. 이전 시대의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너무 투쟁적인 시선으로만 볼 일도 아니다. 간혹 학회에서 젠더 담론을 논한다면서 우리 이야기 속의 성 담론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태도가 나타나곤 한다. 좀 더 세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