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선한 의지는 ‘방패’가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영등포역 지하상가에 입주한 점포 60곳 중 상당수가 제로페이 가맹점임을 알리는 스티커 위(빨간색 동그라미)로 플래카드나 광고지 등을 붙여놔 소비자들이 이를 인지하기 어려웠다. [중앙포토]

서울 영등포역 지하상가에 입주한 점포 60곳 중 상당수가 제로페이 가맹점임을 알리는 스티커 위(빨간색 동그라미)로 플래카드나 광고지 등을 붙여놔 소비자들이 이를 인지하기 어려웠다. [중앙포토]

“제로페이는 소상공인을 살리자는 좋은 취지에서 시행하는 것이다. 이를 ‘시장 치적 쌓기용’이라고 깎아내리기만 하니 서운하다.”

지난해 말부터 시범 운영하고 있는 제로페이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마다 서울시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불만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소상공인의 신용카드 수수료 부담을 덜어준다는 ‘선의’를 강조한다.

정작 현장에선 외면받고 있다. 결제 방식이 불편하고 사용 혜택이 적어서다. 그런데 최근 가맹점이 부쩍 늘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13일 기준으로 7만9926곳이 가맹점 신청을 했다. 가맹 대상 업소가 40만여 곳이라는 고려하면 20%쯤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불과 일주일새 2만 곳이 늘었다. 여기엔 서울시의 '갑질'이 깔려 있다. 서울시는 특별교부금을 연동시켜 25개 구청을 쥐고 흔들었다. 목표량을 할당하고, 세금을 풀어 유치수당을 지급해 가맹점 확대를 독려하고 있다. 이쯤 되면 ‘무리한 선의’다. 그래도 서울시는 “좋은 뜻을 몰라준다”며 억울해한다.

여행 경비를 지원해주는 사업도 선의에서 시작했다. 서울시는 올해 비정규직 및 특수고용 노동자 2000명을 추첨으로 뽑아 1인당 여행경비 25만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월평균 200만원 미만을 받는 택배원이나 보험설계사, 학습지교사 등이 대상이다. 모두 5억원이 든다. 취약계층에게 휴가 즐길 권리를 제공하고, 내수를 살리자다는 취지다. 역시나 여론이 곱지만은 않다. “세금 풀어 선심 쓴다”는 것이다.

아직은 검토 단계지만 만 19~29세 청년들에게 매달 50만원의 수당을 주는 정책도 나왔다. 구직 지원이나 복지 사각지대를 메우자는 차원을 넘어선 과감한 ‘정책 실험’이라는 설명이다. 2016년부터 서울시는 만 19~34세 미취업 청년에게 최장 6개월까지 5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중위소득의 150% 미만의 한정된 계층의 청년에게 지급하는 데도 '현금 살포'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는 아예 조건 없이 수당을 주는 방안이다.

청년이 어렵다는 데 동의한다. 획기적인 정책도 필요하다. 하지만 현금을 푸는 방안은 최대한 숙고해야 한다. “국가의 미래인 청년 세대가 국가 의존적 성향이 될 수 있다”(김용하 순천향대 교수)는 우려도 우려지만, 당장 곳간부터 걱정된다. 서울의 20대 청년은 155만 명이다. 이들에게 모두 지급하면 9조3000억원이다. 올해 서울시 예산의 4분의 1이 넘는다.

20일 발표한 청량리~목동 강북횡단 경전철도 서울시 자체 분석에서 적자를 면하지 못할 것으로 나왔는데도 밀어붙이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철도 통행시간을 평균 15% 단축하고, 지하철 혼잡도를 30% 줄이고, 약 40만명에게 새롭게 교통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면 적어도 손해보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라며 선의를 강조한다.

관련기사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서양 속담을 들먹이지 않아도 선한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이 주도하는 ‘서비스 복지’에 주목하는 이유다.<중앙일보 2월 21일자 1·3면>

정 구청장은 출산 장려금을 주는 대신 보육 인프라에 투자했다. 최근 5년 새 구립 어린이집 34곳을 늘렸다. 성동구는 2017년 서울 25개 구청 중 출산율 1위에 올랐다. 만 75세 이상 노인 대상으로는  ‘효사랑 주치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의사와 간호사가 어르신 집으로 찾아가 진료·상담해주는 서비스다. 현금을 쥐어지는 건 아니지만 찾아가는 서비스라서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특정인에게 혜택을 몰아주고 수당을 쥐어주는 그 간편한 복지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보다는, 최소한의 예산을 투자해 가장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서비스를 개발해 실질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정 구청장의 호소에 주목해야 한다. 서울 시민들이 바라는 건 ‘좋은 의도’가 아닌 ‘좋은 결과’일 것이다. 선의가 ‘방패’가 돼선 곤란하다.

이상재 복지행정팀 기자 lee.sangjai@joongang.co.kr

이상재 복지행정팀 기자

이상재 복지행정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