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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덮인 바다를 걸었다… 홋카이도의 겨울 한정판 비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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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오호츠크해 고기압의 영향으로 장마가 예상됩니다.”
 과학교과서나 일기예보에서 보고 들은 익숙한 문구다. 여름마다 한국에 비를 퍼붓고 이따금 폭염을 선사하는 그 바다가 세계적인 비경도 만든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엄청난 양의 얼음이 바다에 떠다니는 유빙(流氷) 이야기다. 이 기막힌 장관을 보려면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동북부, 즉 도토(道東) 지역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서는 배나 기차를 타고 유빙을 감상할 뿐아니라 얼음 위에서 뒹굴며 놀기도 한다. 겨울에 눈다운 눈을 보지 못한 데다 봄이 성큼 다가와 당혹스러운 마음을 안고 홋카이도를 찾았다. 궁극의 겨울 풍경이 거기 있었다.

일본 홋카이도 동부 해변은 1월 말부터 3월 중순까지 얼음에 뒤덮인다. 이른바 ‘오호츠크해 유빙’을 볼 수 있는 시레토코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도 등재돼 있다. 시레토코 해변에서 '유빙 워크'를 체험하는 사람들. 최승표 기자

일본 홋카이도 동부 해변은 1월 말부터 3월 중순까지 얼음에 뒤덮인다. 이른바 ‘오호츠크해 유빙’을 볼 수 있는 시레토코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도 등재돼 있다. 시레토코 해변에서 '유빙 워크'를 체험하는 사람들. 최승표 기자

 유빙의 고향은 아무르강

 753만 명. 2018년 일본 땅을 밟은 한국인 숫자다. 역대 최고 기록이다. 도쿄·오사카뿐 아니라 먼 북쪽 홋카이도까지 간 한국인도 많았다. 지난해만 64만 명이 홋카이도를 찾았고, 매해 40~50% 방문객이 늘고 있다. 대부분 삿포로‧하코다테‧후라노 같은 중서부 지역을 찾는다. 눈·온천·해산물이 한국인의 마음을 홀린다. 일본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지역은 조금 다르다. 일본정부관광국은 “홋카이도 방문객의 90% 이상은 삿포로를 중심으로 여행한다. 이제는 ‘도토’를 주목할 때”라며 “겨울철 ‘유빙 관광’은 일본인 사이에서 버킷리스트로 통한다”고 설명했다.

아바시리항에서 출발하는 쇄빙선 '오로라호'. 성수기에는 빈틈없이 450명 정원이 꽉 찬다. 최승표 기자

아바시리항에서 출발하는 쇄빙선 '오로라호'. 성수기에는 빈틈없이 450명 정원이 꽉 찬다. 최승표 기자

 도토 여행의 중심은 아바시리(網走)다. 여기서부터 북동쪽으로 툭 삐져나온 시레토코(知床) 반도가 겨울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오호츠크해에서 밀려온 유빙이 바다를 메운 장관이 펼쳐진다. 바닷물은 얼지 않는다. 하나 오호츠크해는 언다. 몽골·러시아를 거친 아무르강이 흘러들어 염도가 낮고, 한겨울 영하 20~30도 추위가 이어지면서 빙하 같은 얼음층이 생긴다. 아무르강 하구에서 아바시리까지는 약 1000㎞. 얼음은 조류를 따라 남쪽으로 여행하며 점점 커진다. 유빙이 해변에 닿는 1월 말부터 3월 중순, 도토 지역은 ‘늦겨울 한정판 비경’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유빙은 러시아 아무르강 하구에서 형성돼 혹한의 오호츠크해를 거치며 점점 커지다 홋카이도 동부에 닿는다.. 그래픽=노희경

유빙은 러시아 아무르강 하구에서 형성돼 혹한의 오호츠크해를 거치며 점점 커지다 홋카이도 동부에 닿는다.. 그래픽=노희경

 아바시리 최고의 관광상품은 쇄빙선이다. 배를 타고 얼음을 깨부수며 바다로 나갔다 온다. 지난 10일 쇄빙선 ‘오로라호’에 올라탔다. 450명 정원을 채운 배가 출발했다. 빈틈 하나 없는 3층 갑판에서 어렵사리 난간에 몸을 기댔다. 오로라호는 아스팔트를 뚫는 굴삭기 같은 굉음을 내며 바다를 헤쳐나갔다.
 해변에도 얼음조각은 있었지만, 20분쯤 나가니 아이스링크처럼 눈 덮인 얼음 밭이 수평선까지 펼쳐졌다. 갈매기 떼가 간식을 달라며 배에 따라붙었고 깨진 얼음 틈에서 물고기 사냥을 하는 참수리도 보였다. 온도계가 영하 20도를 가리킨 갑판에서 1시간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에도 강과 바다와 추위가 만든 작품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오로라호 3층 갑판에서 유빙을 감상하는 사람들. 갈매기 떼가 배에 따라붙는다. 최승표 기자

오로라호 3층 갑판에서 유빙을 감상하는 사람들. 갈매기 떼가 배에 따라붙는다. 최승표 기자

 펭귄처럼 얼음 위 저벅저벅

 아바시리역과 시레토코샤리(知床斜里)역을 잇는 두 량짜리 열차 ‘유빙이야기(流氷物語)호’는 쇄빙선과 함께 도토의 명물로 꼽힌다. 2월 3일부터 3월 4일까지, 하루 두 편만 운행하는 1시간짜리 관광 열차다.

유빙이 해안에 닿는 시기에만 운항하는 열차 '유빙이야기호'. 최승표 기자

유빙이 해안에 닿는 시기에만 운항하는 열차 '유빙이야기호'. 최승표 기자

아바시리역에서 산 에키벤. 성게알과 연어알이 듬뿍 담겨 있다. 최승표 기자

아바시리역에서 산 에키벤. 성게알과 연어알이 듬뿍 담겨 있다. 최승표 기자

 아바시리역에서 ‘성게‧연어알덮밥 도시락’을 사 들고 기차를 탔다. 열차 외관부터 승무원 유니폼까지 온통 유빙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차창 밖으로 눈부신 얼음 바다가 내내 펼쳐졌다. 중간역인 키타하마(北洪)에서 10분간 쉬었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시레토코 반도의 연봉과 바다, 앙증맞은 기차가 한눈에 담겼다. 흰색부터 쪽빛까지, 오직 파랑 계열 색만이 아른거렸다.

시레토코 우토로에서 바다로 걸어나가는 사람들. 펭귄 떼를 보는 것 같다. 최승표 기자

시레토코 우토로에서 바다로 걸어나가는 사람들. 펭귄 떼를 보는 것 같다. 최승표 기자

 두 발로 얼음 위를 걷는 ‘유빙 워크’도 인기다. 미국 알래스카나 유럽 알프스의 ‘빙하 트레킹’과 유빙 워크는 차원이 다르다. 얼음 위를 걷다가 바닷물에 퐁당 빠지는 엽기적인 체험이 더해진다. 맨몸으로 들어갔다가는 영화 ‘타이타닉’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신세가 될 터. 시레토코 반도 우토로(ウトロ) 지역, 투어 업체에서 물에 둥둥 뜨는 드라이 수트를 빌려 입는다. 5㎜ 두께의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면, 신기하게도 거위 털 점퍼를 입은 듯 따뜻하고 수영을 못해도 물에 둥둥 뜬다.

드라이수트를 입으면 몸이 젖지 않고 물에 잘 뜬다. 최승표 기자

드라이수트를 입으면 몸이 젖지 않고 물에 잘 뜬다. 최승표 기자

 유빙 관광 성수기여서 우토로는 북적북적했다. 드라이 수트를 입은 관광객 약 50명과 함께 바다를 걸었다. 흡사 펭귄 떼 같았다. 드라이 수트의 성능을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일찌감치 얼음물에 몸을 담그며 괴성을 질렀다. 한데 이게 웬걸. 물에 들어가기 싫어도 두께가 얇은 얼음 위를 걸으니 발이 폭폭 빠졌다.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중장년 여행자도 얼음 구멍에 들어가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큰 얼음조각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감상에 젖는 사람도 더러 보였다. 도쿄에서 온 코타니 신타로는 “어릴 적부터 꿈꾸던 쇄빙선과 유빙 열차 예약이 일찍 마감돼 아쉬웠지만, 유빙 워크 덕분에 아쉬움을 덜었다”며 육중한 몸을 계속 바다에 던졌다.

쇄빙선·유빙 열차…일본인의 로망 #바다에 빠지는 ‘유빙 워크’도 재미 #지금이 절정…3월 중순까지 즐겨 #아바시리 감옥박물관도 필수 코스 #

 풍경에 가려진 상처, 감옥과 아이누

 도토에서는 유빙 말고도 즐길 게 많다. 먼저 홋카이도 8대 절경 중 하나로 꼽히는 ‘메르헨 언덕’. 메만베쓰공항에서 아바라시로 가는 39번 국도변, 낮은 구릉에 7그루 낙엽송이 서 있는 풍경이 그림엽서 같다. 단아한 겨울 풍경 못지않게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보리밭도 근사하다. 메르헨은 독일어로 ‘동화’를 뜻한다.

홋카이도에는 그림엽서처럼 언덕에 나무가 서 있는 풍광이 유독 많다. 아바시리 '메르헨 언덕'도 뒤지지 않는다. 일곱 그루 낙엽송이 보리밭 뒤편에 서 있다. 최승표 기자

홋카이도에는 그림엽서처럼 언덕에 나무가 서 있는 풍광이 유독 많다. 아바시리 '메르헨 언덕'도 뒤지지 않는다. 일곱 그루 낙엽송이 보리밭 뒤편에 서 있다. 최승표 기자

 아바시리 감옥도 들러봐야 한다. 메이지 시대인 1891년부터 야쿠자 같은 흉악범과 정치범을 가둔 수감시설로 1984년 신식 교도소가 생긴 뒤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감옥은 영화 세트장처럼 근사하다. 서양 건축술을 접목해 미감이 빼어난 데다 죄수들이 먹던 음식을 파는 등 스토리텔링에도 공을 들였다. 탈옥왕 ‘시라토리 요시에(白鳥由榮)’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는 급식으로 나온 된장국으로 철문 감시구를 조금씩 녹슬게 한 뒤 좁은 틈으로 어깨를 탈구한 채 빠져나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다시 잡혀왔다.

메이지 시대부터 흉악범을 가뒀던 아바시리감옥. 천장에 탈옥왕 '시라토리 요시에'의 모형이 있다. 최승표 기자

메이지 시대부터 흉악범을 가뒀던 아바시리감옥. 천장에 탈옥왕 '시라토리 요시에'의 모형이 있다. 최승표 기자

 두꺼운 방한복을 입어도 1시간 관람이 쉽지 않은 겨울, 이곳은 감옥이라기보다 지옥에 가까웠다. 러일전쟁을 앞둔 1891년 220㎞ 길이의 군사도로 공사에 투입된 죄수 1200명 중 200명이 숨을 거뒀다. 100년간 전체 사망자 숫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박물관에는 “러시아 견제가 중요했던 시절, 아바시리 감옥이 홋카이도 개척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쓰여 있다.

홋카이도 원주민 전통문화를 엿볼 수 있는 아이누 민속마을. 최승표 기자

홋카이도 원주민 전통문화를 엿볼 수 있는 아이누 민속마을. 최승표 기자

 메이지 시대, 일본에 편입되기 전까지 홋카이도는 아이누의 땅이었다. 아이누는 홋카이도와 사할린, 쿠릴 열도에 살던 원주민인데 지금은 일본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현재 아이누 인구는 2만~3만 명으로 추정한다.
 아바시리 남서쪽 88㎞, 아칸호(阿寒湖) 인근에 ‘아이누 민속 마을’이 있다. 기념품점과 식당 등 24개 점포가 들어앉은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그러나 수천 년간 거친 자연과 부대끼며 일군 고유한 문화를 만날 순 없었다. 도리어 작은 테마파크 같았다. 아이누 후손들이 목각인형을 팔며 간신히 전통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갑자기 ‘겨울왕국’의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가와유 다이이치 호텔에서 맛본 4가지 게 코스 요리. 최승표 기자

가와유 다이이치 호텔에서 맛본 4가지 게 코스 요리. 최승표 기자

여행정보

 한국에서 홋카이도 동부로 가는 정기 항공편은 없다. 전세기(올겨울은 마감)를 타지 않는다면, 일본항공이나 ANA의 김포~하네다(도쿄)~메만베쓰 노선을 이용하면 된다. 삿포로에서 아바시리까지는 약 330㎞. 기차가 운행한다. 겨울철 장거리 렌터카 운전은 위험하다. 숙소는 호수 전망이 빼어난 ‘아바시리코소’, 창밖으로 유빙이 보이는 ‘시레토코 노블 호텔’, 4종류 게 코스 요리가 유명한 ‘가와유 다이이치 호텔’을 추천한다. 가와유 호텔 인근에 ‘이오우잔유황산’이 있다.

아바시리호의 고즈넉한 정취를 감상하기 좋은 료칸 '아바시리코소'. 최승표 기자

아바시리호의 고즈넉한 정취를 감상하기 좋은 료칸 '아바시리코소'. 최승표 기자

아바시리(일본)=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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