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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당일에도 출근한 직장맘···20년 버텼지만 결국 밀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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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미생'에서 어린 아이를 기르는 직장맘의 고충을 그린 장면

tvn 드라마 '미생'에서 어린 아이를 기르는 직장맘의 고충을 그린 장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육아휴직을 요청했어요. 그랬더니 '이래서 기혼자를 뽑지 않는거다'라는 답이 돌아오더군요. 결국엔 퇴직을 권유받았습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자 6살,8살 아이의 엄마인 김모씨는 자신이 직장에서 겪은 고충을 이렇게 털어놨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20일 오후 7시 서울 용산구 상상캔버스에서 연 일·가정 양립 간담회에서다. 이날 행사에는 김씨를 비롯한 중소기업 직장맘 10명과 김상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했다.

"회사가 먼거리로 이사를 가서 아이를 돌보는 게 너무 힘들어졌어요. 팀원들에게 육아휴직에 대해 상의 했더니 팀원들도 전혀 공감을 못하더라고요. '그런 건 큰 기업에서나 하는거다. 마음은 알겠는데 현실을 보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이날 참석한 직장맘 정모씨는 육아휴직 고민을 털어 놓았지만 동료들에게 응원받지 못했던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중소기업 직장인들에게 육아휴직은 '그림의 떡'이었다. 유연근무나 단축근무도 자신과는 관계 없는 먼 이야기였다. 직장맘 박모씨는 장시간 근로로 육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박씨는 "퇴근하면 아이가 자고 있고, 출근할때 보면 또 아이가 자고 있다. 아이가 엄마 얼굴도 못 보고 지낸다"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정부는 여성의 경력단절을 막고 저출산 해소를 위해 많은 예산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경력단절 여성 비중은 제자리걸음이다. 2016년 20.5%였던 경력단절 여성 비율은 지난해에도 20.5%를 기록했다. 투입한 예산에 비하면 성과가 초라하다. 대기업ㆍ공공기관은 여성은 물론 남성 육아휴직자가 매년 급증하고 있다. 육아기에 근로시간을 줄이는 육아기 근로단축제나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유연근무제도 도입돼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에 이러한 일·가정 양립 제도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김상희 저출산위원회 부위원장은 "전체 기업의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여성근로자의 경력단절 상황이 심각하다"라며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비해 중소기업이 제도와 정책이 잘 운영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여성 근로자의 경력단절 비중은 78.2%로 대기업(54.8%)이나 공공기관(26.9%)에 근무하는 여성에 비해 경력단절 비율이 최대 3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력단절은 직장 내 불이익에서 비롯됐다. 또 다른 직장맘 김모씨는 육아를 위해 단축근무를 요청했다가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는 회사에선 "대체근로자가 너보다 일 잘하면 그 사람을 뽑을거다"라는 말을 들었다. 때마침 둘째 아이가 생겨 회사를 관뒀다. 원래 하던 일이 너무 좋아 다시 재취업을 시도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서류전형에 합격해 면접 일정을 통보하는 전화를 받던 중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이가 있냐"는 물음과 함께 "면접일정을 재조정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씨는 "어차피 일·생활 균형을 못맞출 바엔 가난하게 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상상캔버스에서 중소기업 직장맘의 일생활 균형을 위한 직장맘과의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김상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이번 간담회는 중소기업 직장맘의 고충과 제안을 듣고자 마련됐다. 2019.2.20/뉴스1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상상캔버스에서 중소기업 직장맘의 일생활 균형을 위한 직장맘과의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김상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이번 간담회는 중소기업 직장맘의 고충과 제안을 듣고자 마련됐다. 2019.2.20/뉴스1

육아휴직은 20년 경력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20년간 디자인 분야에서 일해 팀장 자리에 앉은 직장맘 김씨는 아이를 챙기다보니 일이 밀렸다. 그는 '내가 어떻게 이자리까지 왔는데'라는 오기로 버텼다고 한다. 커리어 공백이 두려웠다. "출산 당일에도 출근을 했어요. 퇴근하고 아이를 낳으러 갔고요" 김씨는 아이를 낳고 90일간의 출산휴가만 쓰고 복귀했다.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일에 대한 집착으로 바뀌었다. "아이 때문에 저렇다"라는 말을 듣기 싫어 친정엄마에게 육아를 맡겼지만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육아휴직을 고민하게 됐다. "육아휴직을 신청하니 회사에선 '정신상태가 해이해졌다'는 말과 함께 영업직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육아휴직 시작과 동시에 보직을 바꿔버린거죠" 김씨는 이런 불이익에도 끝까지 버텨 휴직을 얻어냈다. 그는 "요즘 복직할 생각에 매일 밤 악몽을 꾼다. 회사에선 '월급도 똑같고, 직책도 같아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한다"며 씁쓸해했다. 그는 오는 봄 복직한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상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상상캔버스에서 열린 중소기업 직장맘의 일생활 균형을 위한 직장맘과의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인사 나누고 있다. 2019.2.20/뉴스1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상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상상캔버스에서 열린 중소기업 직장맘의 일생활 균형을 위한 직장맘과의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인사 나누고 있다. 2019.2.20/뉴스1

김상희 부위원장은 이재갑 장관을 향해 "중소기업 자체에서 규정을 너무 모른다. 아이를 키우는 직원이 어떤 권리를 갖고있고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지원을 하고있다는 걸 회사에선 너무 모른다"라며 "이 장관께도 늘 이야기하는게 현장에 정보를 제대로 줬으면 좋겠다. 고용평등근로감독관이 현장을 철저하게 봐주었으면 좋겠다. 제도는 다 있는데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만 작동한다. 중소기업에선 작동안한다. 법을 어기는데도 이렇게 흘러간다"라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오늘 참석한 직장맘들이 특별한 분들이 아니다. 삶의 투쟁으로 봐야한다. 노동법을 위반하는 사업주에 대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라고 꼬집었다.
김태호 기자 kim.ta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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