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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RIS 라거펠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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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운동복 바지는 패배의 조짐이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으니 운동복 바지를 입고 나서게 되는 것이다.”

뭐, 이런 말도 있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을 살라.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럭셔리다.”

‘카이저(황제)’ 카를 라거펠트의 발언이다. 범인(凡人)이라면 곁눈질만으로도 눈이 멀게 되는, 혹은 눈을 버리게 되는 화려하면서도 변덕스러운 세계를 수세대 동안 이끈 그의 언어는 이처럼 직설적이었다. 또 때론 오만했고 때론 냉소적이었으며 대체론 유머러스했다. “웨딩드레스를 만들 사람으로 나를 추천하진 않겠다. 이혼하게 되거든”, “난 현실적(down to earth)이다. 다만 지구(의 현실이) 아닐 뿐”이란 식이다.

패션 디자이너로 불렸지만 그의 관심사는 패션에 머물지 않았다. “나의 교사는 나다. 나이 먹어갈수록 호기심이 늘어간다”며 독학하던 그는 실제 예술·역사·건축·문학·정치 분야를 넘나들곤 했다. 2014년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선 특이한 모양의 눈썹을 가진 영국 모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주 눈에 확 띄는 미모는 아니다. ‘비율에서 약간의 기이함이 없다면 미(美)가 아니다’라고 한 게 베이컨이었나?” 20세기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도, ‘경이적 박사(Doctor Mirabilis)’로 불린 12세기 신학자이자 근대과학의 선구자인 로저 베이컨도 아닌, 17세기에 활동한 경험론의 선구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장서 수(30만권이란 설이 있다)를 자랑했을지언정 젠체하진 않았다. “(독서는) 사적 활동이다. 남들이 ‘오, 이 멍청한 사람이 꽤 똑똑한걸’이라고 여기라고 하는 게 아니다. 난 패션 디자이너다. 패션디자이너는 패션잡지를 본다. 됐나?”

어찌 보면 그는 현대적 의미의 르네상스인이었다. 여러 분야의 교차점에 선 천재였다. 예술가이며 인습타파 주의자(iconoclast)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삶 자체는 미스터리했다. “나는 누군가의 삶에서 현실이 되고 싶지 않다. 난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 같으면 좋겠다”고 했다던가. 하기야 출생 연도조차 특정되지 않았다. 샤넬은 1938년이라고 하고 한 전기 작가는 33년을 주장하며 스스론 35년생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고 한다.

라거펠트는 늘 현재에 살았다. “회한도 후회도 없다”고 했다. 회고록을 내란 요구도 뿌리치곤 했다. “사실 나는 내가 기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도 실패할 때가 있다. 평온하기를(rest in style).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