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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대법원장의 상록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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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치팀 차장

김승현 정치팀 차장

지난 18일 밤 다소 낯선 모습의 김명수 대법원장과 조우했다. 한 방송사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특별기획 ‘나의 독립 영웅’ 시리즈에 그가 등장했다. 명사 한 명이 독립운동가 한 명의 일대기를 압축적으로 알리는 내용이다. 이날 방송에 앞서 문희상 국회의장, 배우 최불암·고두심, 소설가 김홍신 등이 출연했다.

김 대법원장은 일제의 탄압 속에 농촌계몽 운동을 펼친 최용신(1909~1935)을 소개했다.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인물이다. 농촌의 문맹 퇴치에 앞장선 그에게 일제는 조선인 학생 수를 줄이고, 교육 내용을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불응하다 고초를 겪으면서도 최용신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강습소 앞마당에 상록수를 심었다. 김 대법원장은 여행작가처럼 역사 속 ‘샘골 강습소’가 복원된 기념관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는 늘 푸른 상록수처럼 어떤 고난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내레이션을 한다.

최용신의 상록수 앞에서 김 대법원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지금 푸른빛과 잿빛이 뒤섞이고, ‘색안경’이 만연한 세계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1년여 전만 해도 우리의 질서를 만든다고 믿었던 곳은 폐허처럼 변했다. 사법 농단의 후폭풍은 원칙과 편법을 뒤섞어 놓았다. 전직 대법원장과 현 정부의 실세를 구속한 법원 판단에 박수와 야유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뭐가 옳은지 분간하기 힘든 와중에 권력분립의 다른 한 축인 국회는 법관 탄핵을 거침없이 외친다. 조만간 김경수 경남지사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보석 여부에 대한 결정이 나오면 사법부에는 또 한 번 모래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 속에서 국민은 물론 사법부마저 ‘사법 문맹’이 될 지경이다.

대법원은 최근 법관 탄핵에 대해 “탄핵 절차에 관해 국회와 헌법재판소에 권한이 있다. 대법원에서 이에 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국회에 공문으로 전했다. 이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더불어민주당은 원론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인 반면, 자유한국당에서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부 독립에 수세적이어서 법관 탄핵의 빌미를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앞으로도 혼돈은 계속되고 김 대법원장은 가혹한 시험에 들게 될 것이다. 사법부의 과오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 법관 탄핵에 대한 국회의 결정과 맞닥뜨려야 한다. 허허벌판에 학교를 짓고 10리 밖 어린이를 매일 가르치러 다닌 최용신처럼, 상록수 같은 소신으로 헤쳐나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김승현 정치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