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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국민은 '마음의 병' 호소하는데… 무료 심리지원센터 전국 3곳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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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여성 A씨(35)는 경제적으로는 자립했지만, 가족과의 단절된 삶 때문에 평소 외로움과 분노를 호소해왔다. 심리지원센터를 찾아 억눌렸던 감정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그동안의 노력이 정당함을 스스로 인정하게 됐다. 우울증도 상당 부분 완화됐고 어머니를 다시 만나 자신의 속마음을 전하면서 화해의 물꼬를 텄다.
 취준생 남성 B씨(27)는 취업난과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면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던 와중에 지인의 추천으로 심리지원센터를 알게 됐다. 심리 상담과 검사를 받으면서 자신의 심리 상태와 행동 동기를 이해하게 됐고 치료에 대한 희망도 갖게 됐다. B씨는 "상담을 통해 내가 느껴온 고통의 뿌리를 이해하게 된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됐다"며 "고통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난해 4월부터 공식 운영을 시작한 서울 심리지원센터(동남·동북·서남 등 3곳)에서 상담과 교육을 받은 시민들의 실제 사례들이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지만 남몰래 '마음의 병'을 앓다가 심리센터의 문을 두드렸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본 경우다.
 사람들은 대체로 스트레스·불안·우울·정서장애 등 심리적 고통을 느끼면서도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치료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만 숨기고 싶은 내면세계는 민감한 프라이버시라서 다른 사람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걸 꺼리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과 병원에서 상담이나 치료를 할 경우 진료 기록(정신질환 F 코드)이 남으면 나중에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거라고 지레짐작해 불이익을 걱정하는 경우도 적잖다.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를 한영경 팀장(오른쪽)과 은희진 교육총괄이 소개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를 한영경 팀장(오른쪽)과 은희진 교육총괄이 소개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솔직히 필자도 심리 상담과 검사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취재를 위해 오십 평생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심리 상담과 검사 및 교육을 받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북한산 백운대가 바라보이는 덕성여대 캠퍼스의 한옥 건물 덕우당에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가 입주해있었다.
 상담과 교육으로 구성된 심리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먼저 전화로 접수 상담을 받아야 했다. 상담 경력 4년 차인 정수진 상담사는 인적사항·학력·직업·종교 뿐 아니라 경제 상황, 상담 경험, 현재의 고민 등을 차례로 친절하게 물었다. "직장 생활 만족도와 가족 관계를 더 좋게 하기 위해 상담을 받기로 했다"고 동기를 밝혔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국민소득 3만달러인데 대한민국 #국민행복지수는 OECD 하위권] #지난해부터 서울 3곳 정식 운영 #무직·학생·주부 등에 인기 많아 #우울과 대인관계 스트레스 호소 #전화 상담에 이어 해석상담 진행 #마음 다스리는 심리교육도 도움 #수십 만원짜리 심리검사가 무료 #자살과 행복지수 추락하는 지금 #복지부와 자자체들 적극 나서야

 동북센터에서 심리상담을 받은 시민은 2018년에만 385명이었다. 여성(80.7%)과 20대(43.6%)가 많았고 직업은 무직(19.7%), 학생(18.7%), 주부(17.4%) 순으로 많았다. 우울(39.7%), 대인관계 스트레스(15.8%), 가족관계 갈등(13.5%), 불안(9.6%) 순으로 고충을 호소했다.
 임상심리학(석사)을 전공한 정수진 상담사는 "요즘 내가 이렇게 심적으로 힘든데 이런 무료 상담과 교육 서비스가 왜 이제야 제공되느냐"고 토로하는 시민도 있다고 전했다.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 교육 참여자들이 웰빙과 스트레스 경험 사례를 적은 뒤 옆사람과 토론하고 있다.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 교육 참여자들이 웰빙과 스트레스 경험 사례를 적은 뒤 옆사람과 토론하고 있다.

 접수 상담 다음 단계는 센터에서 진행된 심리검사였다. 먼저 상담 절차와 내용을 설명 듣고 동의서를 작성했다. "상담 내용은 철저히 비밀이 보장되고 3년간 보관한다"고 설명했다. "센터 이용 중에 자살을 시도하지 않고 자살 위험이 있을 경우 반드시 센터에 알리겠다"고 서명해야 한다.
 삶의 만족도 척도(SWLS) 검사, 한국형 알코올중독 간이 검사(AUDIT-K, 10문항), 심리 정서 상대척도 검사를 차례로 받았다. 검사 당일을 포함해 지난 2주간의 우울한 기분 검사(K-BDI-2), 검사 당일을 포함해 지난 1주간의 불안 증상 검사(K-BAI)가 이어졌다. 문장완성 검사(SCT, 50문항)는 주어진 문장의 빈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내용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다면적 인성검사(MMPI-2)는 무려 567문항을 답해야 해서 좀 힘들었다. 전체적으로 심리 검사를 하는데 2시간이 꼬박 걸렸지만 유익했다. 무엇보다 시중의 사설 상담소에서 수십만원 받는 심리 검사가 무료라서 반가웠다.
 한영경 팀장이 심리검사 결과를 토대로 해석 상담을 진행했다. 우울과 불안 검사, 다면적 인성검사는 대체로 정상 범위로 나왔다. "가끔 뱀 꿈(악몽)과 입시지옥 관련 꿈을 꾼다"고 응답했더니 공포지수가 조금 높게 나와 다소 민망했다.
 개인적 성격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 실시하는 16가지 성격유형 검사(MBTI, 93문항)를 받아보니 평소 나 자신도 정확히 몰랐던 나를 확인하는 기회였다. 한영경 팀장은 "이런 검사를 통해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심리라는 저울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가 제공하는 '지금 내 마음 체크 리스트'와 '자비 축원문'. 휴대가 가능하다.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가 제공하는 '지금 내 마음 체크 리스트'와 '자비 축원문'. 휴대가 가능하다.

 센터에 따르면 해석 상담은 주 1회 50분씩, 기본이 4회로 진행된다. 상담을 더 받길 원하면 심층 상담은 4회 추가도 가능하다.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2회 이상 불참하면 상담이 종결된다. 100명 중 5~6명이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전화로 스케줄 조정은 가능하다. 센터 관계자는 "심층 상담에서 정신과적으로 어려움을 보이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이 경우 심층검사를 진행하고 약물 복용을 권고하거나 병원 진료 연계를 해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동북센터에서 운영하는 심리 교육프로그램도 참관했다. 동북센터의 심리교육 프로그램은 마음건강 특강(1회 50명 이상)과 심리성장 프로그램(마음 챙김 명상, 긍정심리 훈련,동기관리, 의사소통 훈련 등)으로 구성됐다. 한 번에 2시간씩 8회(총 16시간)로 구성된 심리성장 프로그램 중 5회차 참여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육 현장을 지켜봤다. 이날은 마음 챙김과 긍정심리가 주제였다. 먼저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 챙김(Mindfulness) 명상을 5분간 진행했다.
 한 참석자가 "대학생 딸이 MT 갔는데 이번엔 또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시고 올지 걱정"이라고 말하자, 다른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최설 강사는 "그런 욕구와 싸우지 말고 힘을 빼는 것이 마음 훈련이다. 긍정은 좋다(Good)가 아니라 그렇다(Yes)는 뜻이니 마음 챙김으로 지반을 다지고 그 위에 긍정심리의 탑을 세워보라"고 권유했다.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는 덕성여대 캠퍼스의 한옥 덕우당에서 진행된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심리 상담과 교육 공간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는 덕성여대 캠퍼스의 한옥 덕우당에서 진행된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심리 상담과 교육 공간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

 미국 정신의학자 윌리엄 글래서가 창안한 생존·성취(힘)·관계(소속)·자율·재미 등 인간의 기본 욕구 5가지 선택이론에 따라 A4 용지의 앞면과 뒷면에 참여자들이 각자 행복할 때와 스트레스받을 때를 적도록 했다. 한 참여자는 "바쁜 일상과 일 부담 때문인지 생존 욕구가 높게 나왔다"고 했고, 다른 참여자는 "나 자신을 성취형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으로 나왔다"며 놀라워했다.

 50대 여성 참여자는 "취업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취준생 딸에게도 참여를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40대 참여자는 "민간 상담소와 달리 심리지원센터는 무료라서 좋다"고 반색했다. 실제로 민간에서 유사한 상담을 받으려면 비용이 만만찮다. 서울 강남의 한 의원에 전화를 걸어봤더니 1시간 심리상담을 받는데 20만원을 요구했다. 보험도 적용되지 않았다. 심리 검사까지 받으면 40만~50만원이 든다고 안내했다. 민간에서는 종교인뿐 아니라 심지어 무속인까지 심리상담을 하고 있어 엉터리 상담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자격 조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가 위탁 운영하는 3곳의 서울 심리지원센터는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면서 심리지원서비스를 받으려는 시민들이 줄을 서고 있다. 센터의 인력과 예산의 제약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 불편은 풀어야 할 숙제다. 50대 여성 참여자는 "센터가 집에서 멀어 오는 데 2시간이 걸렸다. 직장이 서울이지만 집이 있는 경기도에도 이런 심리지원센터가 생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직장인을 위해 저녁 시간이나 공휴일에 프로그램을 개설하면 더 많은 시민이 편리하게 이용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김정호(가운데)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장(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과 함께 요가 동작으로 몸을 풀고 있는 교육 참가자들. 명상과 마음 챙김은 심리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

김정호(가운데)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장(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과 함께 요가 동작으로 몸을 풀고 있는 교육 참가자들. 명상과 마음 챙김은 심리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장인 김정호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마음 챙김·긍정심리 연구회장)가 운현궁 옆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에서 진행하는 마음 챙김 명상과 긍정심리 훈련은 신청 공고 즉시 마감될 정도로 인기다. 직장인을 위해 2주간 금요일(오전 9시~오후 6시)에 진행된다. 20명이 참여한 지난 15일 현장을 찾아가봤다. 김 센터장은 "화(불)는 감정인데 감정의 연료인 생각을 줄이면 불은 꺼진다"고 설명했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왔다"는 한 여성 참여자는 "스트레스받지 않기 위해 남편을 바꾸고 싶다"고 농담으로 말하자 김정호 센터장은 "화가 나면 남편이나 아내를 바꾸고 싶겠지만, 후폭풍이 만만찮을 테니 나 자신을 바꿔보시라"고 권했다.
 김영한 전 서울시 의원 등이 발로 뛰어 2017년 9월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심리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면서 서울시는 당초 25개 구를 4개 광역 권역으로 나눠 1곳씩 심리지원센터를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서북센터는 아직 위탁 운영자를 찾지 못했고 관련 예산도 확보하지 못해 서울시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낙연 국무총리, 노영민 비서실장과 국무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이낙연 국무총리, 노영민 비서실장과 국무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정부에 국민 전체를 상대로 범정부 차원의 심리 서비스를 체계적으로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자살률 세계 1위(자살률 높은 리투아니아가 2018년 OECD에 가입하면서 한국이 2위가 됨)였던 한국 정부에 경보를 울렸지만,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가시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인데 보건복지부에 심리지원과조차 없다. 심리 서비스를 제공할 핵심 인력인 심리사에 대한 기본법조차 없고, 심리사 숫자도 여전히 OECD 평균의 26분의 1뿐이다.

155개 국을 상대로 한 유엔의 '국민행복지수' 조사에서 한국은 2013년 41위에서 지난해 57위로 추락했다.

155개 국을 상대로 한 유엔의 '국민행복지수' 조사에서 한국은 2013년 41위에서 지난해 57위로 추락했다.

 최진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한국심리학회 이사)는 "정신질환에 따른 사회·경제적 비용이 8조원(2015년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을 넘었다"며 "감기도 예방과 조기 치료가 중요하듯 자살이 급증하고 행복 지수가 나빠지는 지금이야말로 질환자에서 전 국민으로 심리서비스를 확대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복지부 건강정책국 관계자는 "(서울시처럼) 공공 심리지원 서비스를 별도로 하려면 정책 검토가 필요하다"며 여전히 소극적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사실상 손 놓고 있는 동안 한국 경제의 저성장과 장기 불황, 빈익빈 부익부에 따른 사회경제적 양극화, 정치 이념적 진영 갈등 격화 등으로 5000만 국민의 정신 건강에 빨간 불이 켜져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최근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국가 위상과는 달리 국민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OECD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유엔이 발표한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2013년 6.267에서 2018년에는 5.875로 하락했다. 155개 조사 국가별 순위도 한국은 2013년 41위에서 2018년에는 57위로 밀렸다.

서울 심리지원센터와 중앙 자살예방센터가 국민 정신건강 증진 이벤트에 활용하는 원은희 화가의 그림. 심리학자들은 감기처럼 마음의 병도 예방과 사전 대응이 사회적 비용를 줄인다고 충고한다. [원은희 제공]

서울 심리지원센터와 중앙 자살예방센터가 국민 정신건강 증진 이벤트에 활용하는 원은희 화가의 그림. 심리학자들은 감기처럼 마음의 병도 예방과 사전 대응이 사회적 비용를 줄인다고 충고한다. [원은희 제공]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이정원 인턴기자가 이 기사의 영상 편집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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