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빚의 고리’에 발 묶인 자영업자들…“대부업조차 밀려난 사금융 이용자 45만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최저임금 인상과 경기침체 등에 따른 영업난으로 폐업하는 자영업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서울의 핵심상권 중 하나인 이화여대 앞의 비어 있는 한 상가에 새 주인을 구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중앙포토]

최저임금 인상과 경기침체 등에 따른 영업난으로 폐업하는 자영업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서울의 핵심상권 중 하나인 이화여대 앞의 비어 있는 한 상가에 새 주인을 구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중앙포토]

서울 마포구 홍익대 근처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던 이모(55)씨는 지난해 말 가게 문을 닫았다. 영업한 지 6개월도 안 돼서다. 개업 첫 달에는 손님이 북적이더니 연말로 갈수록 빈 테이블이 많아졌다. 기대와 달리 단체 손님도 드물었다.

이씨는 애간장이 탔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친척에게도 손을 벌려 4억원을 쏟아부은 가게였다. 하지만 한 달 매출에서 임대료(1300만원)와 인건비(1000만원) 등 고정비를 빼고 나면 손에 쥐는 게 없었다. 대출 원금을 갚아 나가기는커녕 이자를 낼 돈도 부족했다.

이씨는 “30년 넘게 찜닭·해장국 등 여러 식당을 해봤는데 요즘처럼 장사하기 힘든 적은 처음”이라며 “더 버텼다간 빚만 눈덩이처럼 쌓일 거 같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장사는 안되는 상황에서 빚더미에 허덕이며 고민하는 자영업자들이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권의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609조2000억원(지난해 9월 말 기준)에 이른다. 2017년 말보다 60조원가량 불어났다.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자영업자들은 저축은행이나 신용협동조합 같은 제2금융권을 찾는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금융 당국의 대출 규제로 제2금융권도 대출 문턱이 높아졌다.

제2금융권에서도 외면당한 자영업자들이 찾을 수 있는 합법 대출의 마지노선은 대부업체다. 최고 연 24%의 고금리가 적용되지만 제도권 금융회사보다는 대출 문턱이 낮아서다.

하지만 대부업체의 대출 심사도 갈수록 깐깐해 지고 있다. 신용등급 7등급 이하 자영업자는 대부업체에서도 돈을 빌리기 어려운 게 냉정한 현실이다. 지난해 법정 최고금리 인하(연 27.9→24%)로 대부업체도 ‘고객 고르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부산의 한 거리에 일수 등 불법 사금융 전단지가 널려 있다.

부산의 한 거리에 일수 등 불법 사금융 전단지가 널려 있다.

지난해 말 기준 대부업체 이용자 중 중간 정도의 신용등급(4~6등급)을 가진 사람들은 40만5000명이었다. 6개월 동안 4000명가량 늘었다. 반면 저신용자(7~10등급)는 같은 기간 2만8000명 줄었다.

서민금융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대부업체의 대출 거절 비율이 가장 높은 직업군은 자영업이었다. 최근 3년간 대부업이나 불법 사금융을 이용한 38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다. 이 조사에서 자영업자의 대출 거절 비율은 64%를 넘었다. 자영업자 세 명 중 두 명꼴로 대부업체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얘기다.

대부업체에서 밀려난 자영업자들은 우선 가족과 친척에게 손을 벌렸다. 그래도 안 되면 초고금리가 적용되는 불법 사금융으로 향했다.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15%는 “(불법)사금융을 이용했다”고 답했다. “부모나 형제 등 가족에게 돈을 빌린다”는 답변(43.9%)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장은 “대부업체도 수익이 줄고 부실 우려가 커지면서 대출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며 "약 45만 명이 대부업체에서도 밀려나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600조원 넘어선 자영업자 대출. 자료: 한국은행

600조원 넘어선 자영업자 대출. 자료: 한국은행

3년 전 건축 설계업에 도전했던 청년 창업가 이모(30)씨는 지난해 회사 문을 닫았다. 그는 “건설 경기 침체로 일감이 급격히 줄어 신용카드와 저축은행 대출을 돌려가며 생활비를 충당했다"며 "신용등급이 7등급으로 떨어지면서 더 이상의 대출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이어 “대부업체를 찾아갈까 수없이 고민하다가 빚 독촉이 두려워 회사를 정리했다”고 말했다.

신성환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전 한국금융연구원장)는 "최저임금 인상과 경기둔화가 겹치면서 자영업 대출이 가계대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며 "돈줄이 메마른 한계 영세 사업자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상완 현대경제연구원 총괄연구본부장은 “경기 둔화로 빚에 허덕이다 문 닫는 자영업자가 늘면 결국 내수경제가 한층 더 위축되는 악순환을 겪을 수 있다”며 “영세사업체가 잇따라 폐업하기 전에 이자 부담을 낮춰 주거나 상환 기간을 미뤄주는 구체적인 채무조정안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염지현·정용환 기자 yjh@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