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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창업 생태계에도 여성 차별 존재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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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현주 옐로우독 대표(왼쪽)과 옐로우독에서 투자받은 연현주 청소연구소 대표. 판교=박민제 기자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왼쪽)과 옐로우독에서 투자받은 연현주 청소연구소 대표. 판교=박민제 기자

지난해 변호사시험 합격자 중 여성 비율은 43.34%였다. 5급 행정직 공채에선 40.5%, 외교관 후보자 중에선 60%가 여성 합격자였다. ‘여풍’(女風)‘이란 말이 진부하다 느껴질 정도로 사회 전반에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벤처·스타트업계로 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벤처기업 3만6820개 중 여성이 대표로 있는 기업 비율은 9.5%(지난해 말 기준)에 불과하다. 2016년(8.8%) 이후 조금씩 늘고 있다 해도 여전히 다른 분야에 비해 여성 비율이 적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대체 창업 생태계의 어떤 점이 여성들의 생존을 어렵게 하는 것일까. 중앙일보는 제현주(44) 옐로우독 대표와 연현주(41) 청소연구소 대표를 지난 달 31일 경기 성남 판교밸리 청소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제 대표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트업에 주로 투자해온 벤처캐피털리스트다. 연 대표는 제 대표의 옐로우독 등의 투자를 받아 가사도우미(매니저)를 연결해주는 모바일 플랫폼 스타트업인 청소연구소를 2017년 창업했다. 현재 매니저 수는 6000여명이며 가입자 수는 15만명에 이른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아이 셋 키우는 스타트업 대표, 창업을 말하다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가 창업 생태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판교=박민제 기자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가 창업 생태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판교=박민제 기자

 두 사람 모두 창업을 시도하는 여성 자체는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창업 이후 투자를 지속해서 받으며 생존하는 데 있어서 ‘기울어진 운동장’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제 대표의 설명이다.

“대기업 신입사원, 외교관, 공무원, 법조계에 진입하는 신규인력 중에는 확실히 여성이 많아졌다. 긍정적 해석도 있지만, 오히려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해당 분야들은 대체로 객관적 시험을 거쳐서 들어가는 분야다. 진입 시점에 공정한 프로세스가 존재하는 곳에선 확실히 여성 비율이 올라간다는 얘기다. 역으로 그렇지 않은 분야에는 여전히 여성이 적다. 창업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창업을 시도하는 여성은 많이 늘고 있다. 하지만 그다음 확실히 투자를 받는 단계에서는 아직 여성 비율이 많이 낮다.”

 그렇다면 왜 창업 이후 여성들은 투자를 받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을까. 제 대표는 벤처캐피탈(VC)의 인적구성이 다양하지 못한 점이 일차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심사역 중 여성이 한명도 없는 VC도 많다”며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너무 균질한 집단이 돼 버리면 편향된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제연주 옐로우독 대표(왼쪽)와 엘로우독서 투자받은 연현주 청소연구소 대표. 판교=박민제 기자

제연주 옐로우독 대표(왼쪽)와 엘로우독서 투자받은 연현주 청소연구소 대표. 판교=박민제 기자

 창업 이후 여러 VC로부터 투자를 받아온 연 대표도 여성을 상대로 한 서비스나 소비재를 공급하는 스타트업의 경우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투자자를 설득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연 대표는 “심사역들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심사할 수밖에 없다. 내 아이템은 승객과 택시를 연결해주는 카카오택시처럼 가사도우미와 청소가 필요한 집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인데 확실히 여성 심사역과 30대 기혼 남성은 관심을 크게 보였다. 반면 미혼 남성 또는 결혼은 했지만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는 남성들은 설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임신이 가장 큰 CEO 리스크?

청소연구소 모바일앱 화면

청소연구소 모바일앱 화면

한국IBM, 엔씨소프트, 카카오 등 굴지의 IT기업을 거친 뒤 2017년 창업 전선에 나선 연 대표는 초등학생 아들 셋을 키우고 있는 ‘워킹맘’이다. 창업 이후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아이 셋 엄마가 창업하는 건 힘들지 않겠냐”였다고 한다. 연 대표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연현주 청소연구소 대표가 창업 과정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판교=박민제 기자

연현주 청소연구소 대표가 창업 과정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판교=박민제 기자

“투자자 입장에선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다. 스타트업 대표는 절실한 마음을 갖고 지속해서 힘든 일을 이겨내야 하는데 아이 키우기 힘들다고 그만두고 다른데 취직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암묵적인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난 ‘아들 셋 둔 엄마가 도대체 얼마나 창업이 하고 싶길래 여기까지 왔겠냐’고 답했다. 사실 아이 키우는데 창업과 직장 생활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하는 직장 생활이 유연성이 떨어져 아이 키우기 더 어렵다. 또 창업하고 대표가 되면 근무 형태를 유연하게 가져가는 등 조직 문화를 자기가 만들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다만 회사 미래에 대한 심리적 압박은 조금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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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우독이 청소연구소에 투자한 이유 중 하나도 연 대표가 창업한 ‘결심의 무게’였다고 한다. 제 대표의 설명이다.

“과거 다른 VC 심사역들 중에 젊은 여성 창업자한테 대 놓고 ‘임신이 가장 큰 CEO 리스크’라는 얘길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막막한데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나. 투자를 받은 뒤 임신한 사실을 이사회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걱정하는 여성 창업가도 봤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환경적 요인들이 알게 모르게 여성들이 창업하는데 허들을 높여왔다. 그래서 나는 반대로 생각했다. 애 3명 있는데 키우기도 벅찰 텐데, 그런 여성이 창업한다고 나섰다면 도대체 얼마나 의지가 강한 건가. 거기에 집중했다.”

‘젠더 렌즈’ 투자, 이제 대세다

옐로우독이 최근 여성 창업자와 기업에 투자하는 전용 펀드를 결성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여성 창업가에게 더 힘을 실어줘서라도 안타깝게 사라지는 스타트업을 없애자는 취지다. 이 펀드는 현재 1차 투자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제 대표의 말이다.

“우리 회사 메인 펀드는 성별에 대한 고려가 없다. 그래도 투자한 여성창업자 스타트업 비율이 30% 정도다. 업계 평균(8~9%)보다 높다. 미국도 여성 파트너가 있는 VC는 여성 창업자에게 투자하는 비율이 평균 30% 정도로 다른 VC보다 3배가량 높다고 한다. 특별한 고려가 없어도 의사결정 그룹에 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평균 그 정도가 늘어난 것이다. 거꾸로 보면 기존 VC들이 놓치는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여성창업자들이 그 정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그런 위치에 있는 초기 여성 창업기업들을 발굴하고 시장 전체에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펀드를 만들었다. 성별에 대한 편향을 인식하며 투자하는 것을 해외에선  ‘젠더 렌즈’ 투자라 부르는데 새로운 투자전략의 일환으로 서서히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연 대표는 경력이 있는 여성 창업을 지원해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험이 없는 대학생 창업에 대한 지원은 많지만, 직장을 5년, 10년씩 다니고 난 뒤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하려는 이들에 대한 지원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연 대표는 이렇게 강조했다.

“후배들 중에 창업 얘기 나오면 꿈틀꿈틀하는 애들이 많다. 지금 직장에서 만족하면 모를까 유리천장 얘기하면서 한계를 토로하면서도 창업을 망설인다. 복잡한 현실적 제약 때문이다. 사실 대기업 다니는 후배들은 창업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직장 어린이집 못 보내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런 직장 경험 있는 여성 창업자들을 위한 타깃형 지원제도가 더 잘 갖춰지면 좋을 거 같다.” 

판교=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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