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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이산 상봉’…북한식 돼지국밥 맛은 딱 부산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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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호 24면

박찬일의 음식만행(飮食萬行) - 실향민이 퍼뜨린 소울푸드 

이북에서 급히 보낸 조리법대로 만든 돼지국밥. 실고추가 인상적이고 약간 붉은 국물의 기운이 특이하다. 부산 서면 포항돼지국밥에서 요리했다. [사진 박찬일]

이북에서 급히 보낸 조리법대로 만든 돼지국밥. 실고추가 인상적이고 약간 붉은 국물의 기운이 특이하다. 부산 서면 포항돼지국밥에서 요리했다. [사진 박찬일]

서울에서 나고 자라 순댓국만 알았지 돼지국밥은 몰랐다. 20년 전쯤 우연히 부산 여행에서 맛본 돼지국밥은 특별했다. 맑은 국물, 내장 없이 살코기만 들어간 삼삼한 맛, 정구지라고 부르는 부추무침 곁들임도 생경했다. 부산은 여러모로 아주 흥미로운 도시다. 서울과 다른 음식문화는 그중 하나다. 그들만의 음식, 그들만의 취식법이 있다. 부산이 근현대사에서 겪은 체험도 이 음식문화에 영향을 끼친다. 한국전쟁 중에 임시수도였다. 현재 기념관이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의 삶과 정체성의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음식도 당연하다. 사람이 움직이면 음식도 따라간다. 그리고는 현지에 동화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돼지국밥이다.
부산 돼지국밥은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1·4후퇴를 중심으로 한 실향민들이 처음 만들어 팔았다는 설이 제일 설득력이 있고 부산 음식문화 전문가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국민속박물관에서도 공식적으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피난민의 유입은 그들의 음식문화가 부산에 뿌리내리게 했다. 나는 7년 전에 범일동에 돼지국밥을 취재하러 갔다. 한때 신발 제조가 부산의 전략 수출산업일 때, 새까맣게 노동자들이 몰려다녔다는 동네다. 하춘화, 남진 같은 가수들이 초청 리사이틀을 했던 보림극장을 기억하는 부산사람들이 많다. 이곳에 할매돼지국밥이 있었다. 이북에서 피난 온 최순복 할매가 고무공장 담벼락 밑 노점에서 시작한 집이다.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고, 휴일에 보림극장에 영화와 쇼를 보러온 노동자들은 이 집에서 국밥으로 배를 채웠다. 이제는 부산의 명소가 되어 줄을 선다. 보림극장은 2007년에 문을 닫았고, 신발산업도 무너졌다. 이제 역사가 흘렀고, 그 증거로 국밥집만 남아 있는 셈이다.

박찬일의 음식만행 - 실향민이 퍼트린 소울푸드 #북에서 명절에 배급받아 보글보글 #채 친 고기에 두부·화학 조미료 가미 #육개장 맛에 개운한 대구탕 느낌도 #국에 밥 말아서 뚝딱, 남북이 통해

지역 일간지 1면에 돼지국밥 광고도 

이북식 돼지국밥의 전형을 보여주는 부산 할매국밥 식당. [사진 박찬일]

이북식 돼지국밥의 전형을 보여주는 부산 할매국밥 식당. [사진 박찬일]

최할머니가 작고하고 이제 며느리 김영희씨(67)가 운영한다. 김씨가 토렴으로 국밥을 마는데, 7년 전에 처음 먹어보고 충격을 받았다. 같은 돼지고기로 만들지만, 순댓국의 대척점에 있는 듯한 느낌, 구수하면서도 은근한 육향으로승부하는 묘한 국밥, 뼈를 넣기는 하지만 고기 향을 넘지 않는 적절한 맛의 고려가 그 국밥에 있었다. 부산은 일간지 1면 제호 아래에 돼지국밥 광고를 싣기도 하는 도시다. 중앙지에서는 중량감 있는 법조인사들이 변호사 개업 인사를 하는 지면이다. 신문에 실리는 각종 모임 소식도 장소가 돼지국밥집인 경우가 아주 많다. 동네, 권역마다 잘하는 돼지국밥이 널렸다. 인터넷에서 인기를 끄는 집에 길게 선 외지인들의 줄을 보면 부산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한다. “맛있는 집은 따로 있는데…”. 그 정도로 자신만의 돼지국밥 맛집이 있다는 얘기다.
나는 돼지국밥 마니아가 됐다. 지금도 시간만 되면 당일치기로 다녀온다. 국밥만 두 그릇 먹고 상경한다. 주변에 나 같은 이들이 꽤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비싼 고속열차료를 물면서. 도대체 왜 이 국밥은 이토록 매력적인 것일까.

약간의 뼈, 돼지고기를 넉넉히 넣어 끓이는 돼지국밥. [사진 박찬일]

약간의 뼈, 돼지고기를 넉넉히 넣어 끓이는 돼지국밥. [사진 박찬일]

할매국밥은 전형적인 이북식이다. 뽀얀 국물 대신 맑고 시원한 느낌이 강하며, 살코기와 약간의 뼈가 국물을 낸다. 돼지국밥은 이북에서도 돼지(고기)국밥이라고 부른다. 순댓국만 먹어온 사람에게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음식이다. 이북에서 가서 냉면 먹고 온 사람들은 많지만, 돼지국밥 먹어본 사람은 못 봤다. 새터민에게서 그 음식이 겨우 증언되고 있을 뿐이었다. 관광객의 접근이 차단된 장마당에서 팔리고, 아니면 설날이나 주요 명절에 배급되는 돼지고기로 국밥을 말아먹기 때문이다. 북한은 단백질 부족에 오랫동안 시달려왔다. 돼지는 식량 생산의 중요한 대상이 된 지 오래라고 새터민이나 언론에서 증언하고 있다. 돼지야말로 고기 맛을 보게 해주는 핵심 재료다. 돼지국밥은 그래서 북한에서 인기를 끈다.
최근 내게 흥미로운 제안이 있었다. 방송제작자인 한 후배가 “이북 국밥을 직접 만들어보겠느냐”고 연락해왔다. 북한은 양력설을 쇤다. 북한에 들어가서 돼지국밥을 찍어오겠다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부산에서 국밥을 재현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북한의 요리전문가가 손으로 쓴 조리법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이 몇 주 전이었다. 조선료리협회 연구사의 육필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이 생겼다. ‘만드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조리법은 내가 알고 있는 부산 돼지국밥 조리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이한 건 남쪽의 육개장 조리법이 살짝 가미된 듯한 느낌 정도.
“돼지고기는 삶아서 꺼내어 살을 떼어내고 뼈는 다시 국물에 넣어 끓인다. 고기는 밥숟가락으로 떠먹기 좋게 썰어 채 친다. 다진 마늘, 고춧가루, 소금으로 가볍게 무친다.”
이 부분은 전형적인 육개장 요리법이다. 육개장은 양지머리를 썰거나 찢어서 양념으로 무쳐서 하는 게 일반적이다. 소금 대신 국간장으로 양념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 정도가 다르다. 그래서 이북식 돼지국밥을 직접 끓여보니 육개장과 비슷한 맛과 느낌이 났다. 요즘 유행하는 묵직한 육개장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대구탕(大邱湯, 代狗湯=대구에서 유명하다고 하여 대구탕이고, 보신탕의 대용이라고 하여 대구탕이라 부름. 서울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이미 팔리고 있던 음식) 느낌과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부산식의 맑은 돼지국밥 특유의 느낌도 풍겼다.

한솥 끓여 나눠먹는 '국밥 정신' 잘 맞아

뼈가 약간 들어가되, 뽀얗지 않고 맑은 듯한 국물이 이북식, 부산식 돼지국밥의 중요한 축이다. [사진 박찬일]

뼈가 약간 들어가되, 뽀얗지 않고 맑은 듯한 국물이 이북식, 부산식 돼지국밥의 중요한 축이다. [사진 박찬일]

조리법을 읽으며 몇 가지 더 흥미로운 대목이 많았다. 전체적으로는 부산식과 유사하되, 북한만의 방식이 있다. 첫째는 두부가 들어간다는 것. 이것이 오랜 관행인지, 양을 늘리기 위한 것인지는 모른다. 또 우리가 화학조미료라고 부르는 것을 ‘맛내기’라고 하여 1인분에 1그램씩을 적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한국의 돼지국밥도 대부분 이 조미료가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는 남북이 이견이 없다고나 할까.
북한은 돼지고기를 배급할 때 고기만 주지 않는다. 대개 뼈에 붙은 고기를 그냥 잘라서 준다. 그걸 ‘지육’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집집이 받아드는 고기의 부위가 다르다. 복불복이랄까. 돼지의 몸이란 부위별로 다른 맛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균일하게 나눠줄 수 없다. 그러니 잘라서 주는 대로 받으면 국밥을 끓이는 것이 제일 무난한 요리방법이라고 한다. 한 솥 끓여서 많은 이들이 나눠 먹는 전형적인 ‘국밥 정신’에 딱 들어맞는다. 고기 공급이 넉넉지 않은 북한 사정에서 당연하기도 하겠다. 그간 북한의 집권층이 새해 유시 등을 통해 늘 강조하는 것이 “밥과 고깃국을 인민이 넉넉히 먹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뜨거운 고깃국과 쌀밥에 대한 갈망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희망이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흥부의 자식들이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는 판소리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지 않은가.

북한식 조리법이 그대로 전해지는 부산식 돼지국밥에 들어가는 고기. [사진 박찬일]

북한식 조리법이 그대로 전해지는 부산식 돼지국밥에 들어가는 고기. [사진 박찬일]

자, 그렇다면 이북식 돼지국밥을 충실히 재현해보자. 부산 서면에 있는 포항돼지국밥집에서 재료를 준비하고 직접 탕을 끓여냈다. 먼저 뼈 붙은 돼지고기를 통째로 피를 뺀다. 5배 정도의 찬물을 붓고 끓이다가 고기가 얼추 익으면 건져내어 육개장식 양념을 해둔다. 뼈는 아직 맛이 우러나지 않았으니 더 끓인다. 이 국물에 간장과 소금, 후춧가루, 맛내기를 넣어 맛을 조절한다. 두부를 넣어 한 번 더 끓인 후 고기를 담아둔 그릇에 두부를 담고 국물을 부어낸다. 실고추를 살짝 얹는다.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별도로 내어 기호에 따라 먹을 수 있게 한다.
오랜 세월, 부산의 돼지국밥은 이북식에서 부산의 음식으로 전화됐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이북식을 먹어보기 전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북한 고유 조리법으로 만들어보니 놀랍게도 현재 부산식의 맑은 돼지국밥과 비슷한 맛이었다. 고춧가루를 버무려서 약간 육개장 맛이 나는 것 말고는 유사점을 보여줬다. 한국의 제일 남단인 부산과 최북단이라 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음식이 각자 같은 유전자로 생생하게 상봉하는 현장이었다고나 할까.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 문화를 습식 조리, 탕반 문화로 정의하는 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남북한 모두 사랑하는 국밥의 존재가 그걸 방증하고 있다.

박찬일 chanilpark@naver.com
글 잘 쓰는 요리사. ‘로칸다 몽로’ ‘광화문 국밥’ 등을 운영하며 음식 관련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본인은 ‘한국 식재료로 서양요리 만드는 붐을 일으킨 주인공’으로 불리는 걸 제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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