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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병실서 마주친 누나와 그녀, 뭔가 찜찜했다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 21화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라'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아라'

생전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 그 덕에 나는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다. 대학 동창 장서희 팀장에게 큰 도움을 받은 뒤에도 자연 이 말이 떠올랐다.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가까운 남산 반얀트리 호텔 양식당으로 예약했다. 퇴근하면서 같이 갈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그리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내가 도착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그녀가 나타났다.

"아니, 이렇게 고급식당으로 하면 내가 부담되는데…."
말은 그랬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 호텔 자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30대 중소기업 직원들이 오기엔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무슨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않고는.

"어때, 맘에 들어?"
"와 본 중에 최고 럭셔리인데."
"내 연봉의 거의 두 배를 구제해 준 분인데 이 정도는 모셔야지. 하하"
장서희는 친구끼리 너무 과하면 서로 곤란하다며 메인 메뉴는 적당한 선에서 고르겠다고 했다. 대신 와인은 평소 못 먹던 거로 하자며 와인리스트를 한참 들여다봤다.

고급 와인 함 먹어볼까
"이거 좀 비싼데 괜찮을까…."
"오늘은 무조건 오케이야. 친구 덕에 나도 한번 고급 와인 먹어 보자구."
그녀가 고른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산이었다. 가격은 26만원이었다.

"어디, 막강팀장 장팀장이 고른 와인 한번 시식해 볼까."
사실 내 입에 와인은 다 그게 그거였다. 떫거나 쓰거나, 단맛이 좀 있거나 없거나 그 정도만 분간할 수 있었다. 비싼 와인이라 음미하면서 먹는다 했지만 1시간도 안 돼 바닥이 드러났다. 그녀는 이번엔 나파밸리 와인으로 한 병 더 시키면서 이건 자신이 사는 거라고 했다.

"저번에 내가 이상한 말 해 좀 부담스러웠지? 여친 없는 줄 알고 수작 좀 걸었지. ㅎㅎ 그런데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그 말은 당연히 원천무효가 된 거, 알지?"
"응 그래……. 그렇지 뭐."

사실 그 뒤 난 아무래도 맘이 편치 않았다. 꺼내기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무슨 죄라도 지은 것 같았다. 정작 당사자는 벌써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데 말이다. 역시 장서희다.

그날 밤 우리는 대학 시절 얘기며, 집안 얘기며, 그동안 연애사까지 별별 얘기를 다 나눴다. 대학 친구니까. 정서희는 당연히 내 여친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나는 조금만 말해줬다. 전직 국어 선생인데 연상이고 돌싱이고 상당히 깐깐하다고. 그러고 보니 중요한 팩트는 다 밝힌 건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누나의 글공부에 영향받은 거 같았다.
-글을 잘 쓰면 말도 조리 있게 할 수 있다. 글이든 말이든 핵심을 앞에 두는 게 좋다. 시작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대부분 고개를 돌려버린다. 특히 요즘 같이 인내심 없는 독자들을 잡아두려면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돌싱 여친에 대해 장팀장은 의외라는 반응이었지만 질문은 많이 하지 않았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하고 싶은 질문은 대체로 나를 곤란하게 만들 것이므로.

우리는 11시가 다 돼 일어났다. 계산대로 가니 장팀장은 이미 자신의 와인값 20만원은 계산한 뒤였다. 내 몫은 38만원이었다. 장서희는 58만원을 혼자 내면 너무 잔인하다며 이 정도로 나누면 자신도 충분히 좋은 대접 받은 것이라고 했다. 역시 직장생활의 달인다운 처세였다.

문병 와서 마주친 두 여자
나는 카카오택시 두 대를 불러 그녀를 먼저 보낸 뒤 나도 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옥수동 집까지는 15분이면 충분할 거 같았다. 그런데 느닷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신호대기 중인 우리 택시를 뒤차가 와서 박은 것이다. 택시 기사는 바로 뒷목을 잡고 끙끙댔고, 사고를 낸 운전자가 미안하다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졸음운전 같았다. 나는 큰 이상을 못 느꼈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허리가 아파 일어날 수 없었다. 택시기사에게 전화했더니 바로 아무 병원이나 가서 누워있으면 가해 차량 보험회사에서 다 해줄 거라고 했다.

장팀장에게 카톡으로 사정을 알렸더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일단 몸이 먼저니 치료부터 제대로 받으라고 했다. 물론 둘이 술 먹은 사실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동네 병원에서는 내 상태가 생각보다 나쁠 수 있다며 큰 병원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그날 저녁 퇴근하면서 장팀장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몸조리 잘하고 빨리 회복해야지, 다른 수가 있겠어?"
생각보다 병원 신세를 오래져야 할 것 같았다. 입원 나흘째 되던 날 누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답장은 1시간 만에 왔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누나가 문병을 왔다.
"누나를 보고 싶으면 이렇게 하면 되는구만."
나는 짐짓 능청을 떨었다. 누나는 상태는 어떤지, 퇴원은 언제 가능한지 물었다.

30분쯤 지나 누나가 나가려고 하는데 장팀장이 들어왔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서로 인사시켰다.
"이쪽은 내가 말한 누나이고, 여기는 우리 회사 동료팀장"
두 사람도 순간 어색한 표정이었다.
"방송국 마케팅부 직원과 회사 근처서 베트남 쌀국수 먹었는데 금방 끝나더라고. 그래서 그냥 한번 들렀어."

그 짧은 시간에 장팀장이 대학 동창이라는 사실은 밝힐 필요는 없었다. 누나가 떠나고 둘이 남자 상황이 오히려 더 묘해졌다.
"문자라도 주고 오는 건데…."
"아냐, 상관없어."
하지만 뭔가 찜찜했다. 남자에게도 촉은 있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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