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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문의하자 의사 대답은 "임신 6주는 70만원, 현금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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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화된 낙태죄 

임신 8주 가량된 태아의 초음파사진 [중앙포토]

임신 8주 가량된 태아의 초음파사진 [중앙포토]

“임신 6주요? 현금 결제만 가능하고 기본 70만원부터 시작합니다.”

낙태 연간 5만 건, 실형은 5년간 1건 #병원 20곳 중 12곳서 “수술 가능” #헌재 다음달 위헌 여부 결정 #자궁 손상 부작용에도 불법 매매 #여가부 “사회적 이유 땐 허용해야” #헌재에 ‘낙태죄 폐지’ 의견서 제출

지난 13일 오후 대구시 중구의 한 산부인과에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문의했더니 돌아온 답이다. "임신 확인을 했느냐"는 질문에 "6주쯤 된 것 같다"고 말했더니 대뜸 수술비를 제시했다. 병원 측은 “예약하고 오면 바로 할 수 있다. 아기 아빠와 함께 오라”고 당부했다. 낙태하려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같은 날 서울 중구의 한 산부인과를 찾은 기자가 접수대에서 “임신 상태인데, 아이 낳을 상황이 안 된다”고 말했다. 병원 직원은 기자를 별도로 마련된 상담실로 안내했다. “다른 병원에서 임신 8주 진단을 받았다”고 말하자 직원은 “초음파 검사와 피검사부터 해야 하고, 기록이 남지 않기 원한다면 모두 비급여(건강보험 미적용)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2시간 이내로 끝나고, 비용은 60만원”이라며 “수술 뒤에 수액을 놔주는데 회복에 도움이 되는 고급 영양제를 선택하면 10만원 더 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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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법이 낙태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음성적인 낙태 수술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일보가 지난 12~13일 서울·대구·부산의 산부인과 20곳을 무작위로 골라 방문·전화 상담으로 낙태 수술 여부를 물었더니 12곳이“가능하다”고 답했다. 3곳은 “전화로는 상담할 수 없다”며 방문을 유도했다. “안 한다”라고 잘라 말한 곳은 5곳이었다.

14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공개한 ‘인공임신중절(낙태)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7년 국내 낙태 건수는 연간 4만9764건으로 추정된다. 성 경험이 있는 여성 중 10.3%,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 중 19.9%가 “낙태수술을 받아봤다”고 응답했다.

낙태를 감행하는 여성과 의사는 처벌 가능성을 감수한다. 형법상 모든 낙태는 불법이다. 형법 269조 1항과 270조는 낙태 수술을 받은 여성과 수술한 의사를 각각 1년 이하, 2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다만 모자보건법은 ▶유전적 장애 ▶전염성 질환 ▶강간 또는 준강간 ▶혈족·인척 간 임신 ▶모체 건강을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이런 합법적인 낙태는 전체의 6.4% 수준이다. 대다수 낙태가 불법인 셈이다. 부산시 서면의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불법 여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의사 생활 15년 동안 줄곧 (낙태 수술을) 해 왔다. 내 나름대로는 환자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심껏 해 왔다”고 말했다. 2년 전 낙태를 경험한 30대 기혼여성 A씨는 “피임 실패로 원치 않는 셋째가 임신됐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도저히 기를 형편이 안 돼 지웠다”며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살 것 같다. 처벌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다”고 털어놨다.

최근에는 수술 대신 약을 복용해 태아를 유산시키는 ‘낙태약’이 등장했다. 낙태가 합법인 미국 등에선 산부인과 전문의의 처방에 따라 초기 임신 중절에 쓰이는 ‘미프진’이다. 국내에선 판매·복용 모두 불법이지만 온라인 사이트·SNS에선 버젓이 팔리고 있다. 한 온라인 사이트 상담채팅방에 “낙태약을 사고 싶다”고 문의했더니 즉시 답이 왔다. 판매자는 “배송은 5~7일 걸리고, 가격은 55만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후유증이 거의 없다. 복용하면 복통, 하혈과 함께 자연 유산되고, 구토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12시간 내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자궁 손상 등 심각한 부작용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 이번 낙태 실태조사에서도 낙태 경험자의 9.8%(74명)는 “약물로 낙태를 시도했다”고 답했다. 이 중 53명은 약물로 낙태가 되지 않아 결국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안나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낙태약으로 '셀프 낙태'를 시도하다 자궁 출혈 등 부작용으로 병원을 찾는 학생들이 꽤 있다.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데도 마구잡이로 팔린다"고 지적했다.

미프진

미프진

정부는 낙태를 거의 단속하지 않는다. 경찰은 낙태 사건 고발이 접수되면 수사는 진행하지만 대부분 기소유예나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 경남지방경찰청은 지난해 9월 경남의 한 산부인과에서 낙태 수술을 한다는 진정을 접수하고 이 병원 환자 26명을 조사했다. 수술 받은 여성 5명을 확인했지만 이들과 의사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실제 재판까지 가더라도 징역형은 드물다. 헌법재판소가 2012년 8월 낙태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후 2017년 11월까지 5년간 전국 법원에서 이뤄진 낙태 관련 판결 80건 중 실형이 선고된 사례는 단 1건뿐이다.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인 헌재는 3월 말 심판선고에서 최종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5월 정부 부처로서는 처음으로 헌재에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여가부는 "낙태 시술이 음성적으로 시행되고 있어 여성의 생명권과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 이미 사문화된 법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여성이 불법 행위자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스더·이은지·백경서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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