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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원 '말레이 스캔들'···미란다 커도 힐튼도 엮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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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유명인사와 말레이시아 정치인, 호화 요트와 피카소 그림, 권력 그리고 천문학적인 돈. 이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이야기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 [AP=연합뉴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 [AP=연합뉴스]

최근 말레이시아를 덮친 세기의 스캔들을 영국 가디언은 11일(현지시간) 이렇게 묘사했다. 나집 라작 전 총리가 2009년 자신이 세운 국영투자기업 1MDB를 통해 수조원의 국비를 비자금으로 빼돌렸다는 내용의 스캔들은 말레이 국경을 넘어 글로벌 이슈로 일파만파 확산 중이다. 이 스캔들에 할리우드 셀럽(유명인사)의 이름이 거론되고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등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나집 라작 전 총리 ‘1MDB 스캔들’ 글로벌 이슈로 확산 #비자금 관리 집사 역할 백만장자 스캔들 ‘몸통’ 지목

가디언에 따르면 이 스캔들을 조사하고 있는 나라는 현재 미국, 스위스, 싱가포르 등 적어도 12개국에 달한다. “단순히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말레이시아를 부끄럽게 하는 거대한 국제적 스캔들”(브리짓 웰시 존 카봇 대학 부교수), “세계 최대 규모의 도둑 정치(Kleptocracy) 사건”(로레타 린치 전 미 법무부 장관) 등의 지적이 나온 이유다.

스캔들의 몸통, 조 로우 정체는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와 그의 비자금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들. [영국 가디언 캡처]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와 그의 비자금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들. [영국 가디언 캡처]

나집 전 총리와 측근들은 경제개발 목적으로 설립된 1MDB의 공적자금을 5년여에 걸쳐 4조~5조원가량 횡령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미 법무부가 이 돈의 흐름을 추적한 결과 미국 베벌리힐스와 뉴욕, 영국 런던 등지의 부동산과 고가 미술품, 사치품 등에 흘러 들어간 정황이 드러났다. 린치 전 법무부 장관은 “다수의 부패한 관료들이 이 공공재산을 마치 개인 은행 계좌처럼 다뤘다”고 밝혔다. 4분의 1가량은 나집 전 총리의 개인 계좌로 옮겨졌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그의 아내인 로스마 만소르 여사의 사치 행각에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레이 당국은 보고 있다. 만소르 여사는 ‘말레이판 이멜다’라 불릴 정도로 현지에서 사치의 여왕으로 통한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와 그의 부인 로스마 만소르 여사. [로이터=연합뉴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와 그의 부인 로스마 만소르 여사. [로이터=연합뉴스]

외신들에 따르면 나집 전 총리의 비자금 조성과 관리를 맡으며 집사 역할을 했던 ‘조 로우’라 불리는 로택조(38)란 인물이 스캔들의 ‘주연 같은 조연’이다. 비자금 일부를 자신의 호화생활에 흥청망청 썼다는 의혹을 받는데 그가 산 뉴욕 맨해튼의 3000만 달러(약 338억원)짜리 펜트하우스나 2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호화 요트 등에 검은돈이 흘러갔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셀럽 여럿이 유탄을 맞은 것도 로우 때문이다.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린제이 로한부터 모델 미란다 커와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 등이 그로부터 피카소 그림과 보석, 페라리 승용차 등 고가의 선물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디캐프리오가 출연한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도 1MDB의 돈 일부가 투입됐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논란이 일자 디캐프리오는 영화 제작사로부터 받은 말론 브랜드의 1954년 오스카상 트로피와 피카소, 바스키아의 미술작품 등을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 커도 로우와의 연인 시절 받은 810만 달러(약 91억원)어치 보석류를 내놨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집사 역할을 했던 조 로우(오른쪽)와 패리스 힐튼. [영국 가디언 캡처]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집사 역할을 했던 조 로우(오른쪽)와 패리스 힐튼. [영국 가디언 캡처]

로우는 말레이시아 중국계 가정에서 태어난 백만장자 금융인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과 미국 등에서 유학을 했는데 영국 최고 명문인 해로우스쿨에 다닐 당시 나집 전 총리의 의붓아들인 리자 아지즈와 연을 맺게 됐고, 이 덕으로 2000년대 후반 금융업에 발을 들였다고 CNN은 전했다. 아지즈는 로스앤젤레스(LA)를 기반으로 하는 레드 그래나이트라는 영화사를 세웠는데 로우는 그와의 친분을 발판으로 디캐프리오와 커 같은 유명인과 네트워크를 갖게 됐다고 한다. 로우는 2010년 말레이시아 일간 더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해로우는 유럽과 아시아, 중동 명문가의 자녀들을 배출했다. 내가 요르단 왕세자를 만난 것도 그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명 인사들과 호화 파티를 즐기는가 하면 골드만삭스 직원들을 ‘브로(Bro·형제)’라고 부르는 등 그의 인맥은 국경을 넘나들었다.

조 로우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영국 BBC 캡처]

조 로우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영국 BBC 캡처]

조 로우 소유의 초호화 요트 ‘에쿼니머티’호. [더 스타 캡처]

조 로우 소유의 초호화 요트 ‘에쿼니머티’호. [더 스타 캡처]

가디언은 로우가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나집 전 총리의 신뢰받는 측근으로 컨설턴트 역할을 했다”며 “1MDB가 골드만삭스와 협력하는 데도 중요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골드만삭스는 1MDB가 채권을 발행할 때 자문역할을 하고 수수료로 수억 달러를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말레이시아 검찰 등은 골드만삭스 자회사들과 전 임직원들을 기소한 상태다. 스캔들이 수면 위로 불거진 이후에도 로우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지난해 5월 총선에서 나집 전 총리가 패한 이후 잠적했다. 외신들은 그가 중국에 머무는 것으로 추정한다. 나집 전 총리는 궁지에 몰리자 자신 역시 로우에게 속았다며 책임을 떠넘긴 바 있다.

묻힐 뻔했던 세기의 스캔들, 어떻게 꼬리 잡혔나

말레이시아 비자금 스캔들을 2015년 초 폭로한 영국 언론인 클레어 루캐슬 브라운. [영국 가디언 캡처]

말레이시아 비자금 스캔들을 2015년 초 폭로한 영국 언론인 클레어 루캐슬 브라운. [영국 가디언 캡처]

어마어마한 스캔들의 민낯을 드러낸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터넷 탐사보도 매체다. 2015년 영국 BBC 출신 저널리스트인 클레어 루캐슬 브라운이 자신이 운영하는 사라와크 리포트라는 웹사이트에서 처음 보도한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부패 이슈를 집중적으로 취재해 오던 브라운은 1MDB 스캔들과 관련된 이메일 약 22만7000건 등 의혹의 증거가 될 문서들을 관계자로부터 전달받았고, 7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나집 전 총리의 개인 계좌로 들어갔다는 전말이 담긴 기사를 터뜨렸다.

이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후속보도를 이어갔고, 말레이시아 관리들은 이를 토대로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1MDB 사무실을 급습했다. 미국 등 관련국에서도 잇따라 조사에 착수했지만, 나집 전 총리가 재임하던 시절이라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비자금 스캔들을 수사 지휘하는 법무장관을 해임하고, 언론 보도를 통제한 것이다. 결국 연관성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 혐의로 사건은 종결됐다. 그러다 지난해 정권이 교체되면서 다시 수사가 시작됐다. 마침내 말레이시아 당국은 약 1억원의 총리 연봉 외 별다른 수입이 없던 나집 전 총리 일가의 자택에서 2억7300만 달러(약 30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압류했다. 여기에는 1400개의 목걸이, 567개의 고가 핸드백, 423개의 시계, 2200개의 반지, 1600개의 브로치 등 명품이 포함돼 있었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비자금 스캔들 관련한 조사의 일환으로 고가의 핸드백과 보석 등이 담긴 가방을 압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말레이시아 경찰이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비자금 스캔들 관련한 조사의 일환으로 고가의 핸드백과 보석 등이 담긴 가방을 압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나집 전 총리는 현재 1MDB 관련 자금세탁과 반부패법 위반 등 총 42건 혐의에 직면해있으며, 부인 만소르 여사도 자금세탁 등 16개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나집 전 총리에 대한 첫 공판은 12일 열릴 예정이었지만 총리 측의 요청으로 연기됐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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