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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면옥, 옛 골목길 살리되 개발 회사엔 용적률 보상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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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호 19면

도시와 건축

재개발 대상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뉴시스]

재개발 대상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뉴시스]

세계 수퍼히어로물의 양대 산맥은 ‘DC 코믹스’와 ‘마블 코믹스’다.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이 속한 그룹이 DC이고, 아이언맨, 엑스맨, 어벤져스 시리즈가 마블이다. 과거에는 DC코믹스가 인기가 더 많았지만 지금은 영화 관객수를 보면 마블의 압도적 승리라고 할 만하다.  왜 마블 영화가 더 인기가 있을까. 그 이유는 마블 영화 속 캐릭터가 더 입체적이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이 극찬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의 스토리를 보면 주인공들이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싸운다. 한쪽은 어벤져스도 완벽하지는 않으니 유엔의 관리를 받아야한다는 입장, 다른 하나는 관리를 받으면 조직이 부패할 수 있어서 안 된다는 입장이다. 두 입장 모두 일리가 있다. 마블 영화에서는 심지어 최고의 악당 ‘타노스’조차도 악당이 된 나름의 사연이 있다. 물론 악당은 악당이다. 하지만 DC영화 속 악당처럼 출생부터 악당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지게 된 사연을 설명해준다. 착한 주인공들끼리도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서 의견충돌이 발생한다. 관객들은 관찰자 입장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이게 마블과 DC의 차이다. 마블 영화에는 선인과 악인이 따로 정해져있지 않고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을 뿐이다. 뜬금없이 만화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건을 보는 시선과도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노포는 1층, 공구상은 신축건물에 #서울시·개발회사 조금씩 양보해야 #재개발은 선악구도로 풀 수 없어 #‘원래부터 나쁜 놈’ 찾기 이제 그만

을지면옥 vs 개발업자

을지면옥과 공구상 등 오래된 가게가 즐비하다. [뉴시스]

을지면옥과 공구상 등 오래된 가게가 즐비하다. [뉴시스]

을지로 개발이 우리나라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오래된 가게를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 그래도 개발을 해야 하는가. 낙후된 건물을 재건축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가 후대를 위해서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의 오래된 기업생태계도 갯벌의 생태계처럼 중요한 자산이기에 유지할 필요가 있다. 재개발은 단순한 선악구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타워즈 영화처럼 개발업자는 제국처럼 항상 악당이고, 오래된 가게는 항상 선한 반란군이 아니다. 반대로 기존 가게들은 개발을 막는 악당도 아니고 개발업자는 항상 경제발전과 좋은 환경을 만들려는 선인도 아니다. 재개발 이야기는 그보다 복잡하다. 얼마 전 을지면옥이 개발업자의 횡포로 오래된 가게를 잃게 됐다고 읍소했다. 이에 국민 여론은 개발업자를 악당으로 몰아세웠다. 얼마 지나 을지면옥이 주변 평균 합의금보다 4배 많은 평당 2억원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여론은 반전됐다. 을지면옥은 이를 근거 없는 비방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은 을지로 재개발 이야기 속에서 누가 ‘악당’이냐를 찾아내려고만 한다. 을지면옥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각종 사회적 사건 때마다 항상 그렇다. 서둘러 누군가를 악인으로 정죄하고 여론은 그 사람을 인민재판하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된다. 그리고는 교훈적 선례를 만들었다고 만족한다.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어떤 사건에서 고난당하는 착한 주인공과 악당으로만 양분해서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자가 가젤을 사냥을 할 때, 사자는 악당이고 가젤은 착한 동물이라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복잡한 생태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징벌이 아니라 시스템의 개선이다.

뉴욕 시티콥 빌딩이 가능했던 이유

보통 개발업자들이 토지 내 가게들을 없애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사업성 때문이다. 일단 우리나라는 토지가격이 무척 비싸다. 일반적으로 토지가가 비싼 뉴욕 같은 경우에도 사업성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용적률도 높고 상층부 주거를 비싼 가격에 분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용적률도 상대적으로 낮고 세대수가 많아지면 분양가 상한제의 규제를 받는다. 따라서 대형개발 프로젝트의 경우 상층부 주거부분에서 수익성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최근 개발회사들은 수익성을 저층부 상업시설에서 확보하려한다. 1층은 보통 평당 1억원에 분양한다. 얼마 전 도심에 주상복합을 디자인할 기회가 있었다. 지하상업공간이 많은 곳이어서 사거리 쪽에 선큰가든을 만들어 소통과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특별한 건물을 디자인했다. 개발회사는 이 디자인을 보자마자 말도 안된다고 거절했다. 이유는 평당 1억원에 분양해야하는 1층 상가에서 200평을 빼서 선큰가든을 만들면 200억원의 이익 손실이 난다는 계산이다. 좋은 디자인이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저층부에 기존 시설을 보존하거나 시민을 위한 공공공간을 만들려면 개발회사가 빠져나갈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뉴욕에 시티콥 빌딩이 있다. 이 공간이 훌륭한 것은 대지 구석에 있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건물을 12층 높이까지 기둥 4개로 띠우고 시민에게 광장을 제공하고 있어서다. 이 개발업자를 칭찬하면서 우리는 왜 그런 착한 회사가 없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감상적 비판이다. 뉴욕의 개발업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우리나라에는 없는 ‘공중권’이라는 제도 덕분이다. 교회는 존치시켜두고 상층부 공중권만 사서 다른 빌딩보다 10층 높게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저층부 대부분을 공개공지로 양보하면서 뉴욕시가 10층 정도 더 높게 지을 수 있게 용적률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행정적 양보 없이 무조건 사업자에게만 양보하라고 하니 개발회사는 싸게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각종 편법을 사용하고 기존 가게를 힘으로 몰아내려는 것이다. 사업성이 없어서 재개발이 안 되는 곳도 넘쳐난다. 복잡한 절차도 걸림돌이다. 각종 심의와 지하안전영향평가 같은 절차를 거치면 1년이 소요된다. 그 과정에서 지불해야 하는 은행 이자가 막대하다. 개발업자는 그 금융비용을 거주자에게 줄 보상을 줄이고 토지를 싸게 매입하는 것으로 해결하려한다. 비효율적 행정절차로 인한 손해가 사회약자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미래에는 3D프린터로 하루만에 400만원으로 집 한 채를 짓는 시절이 올 것이다. 그런 기술적 해결이 나오기 전에는 허가 절차를 간소화해야 사회적 약자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을지로3가 을지다방. [뉴스1]

을지로3가 을지다방. [뉴스1]

우리가 보존해야할 기업생태계를 보는 눈도 좀 더 정밀해질 필요가 있다. 을지로 개발부지에는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있다. 이 중에서 냉면가게는 소비자들이 인도에서 직접 접근해야 하는 식당이다. 이 가게들은 1층에 존치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각종 공구상은 굳이

1층에 있을 필요가 없다. 공구상은 지나가는 행인이 우연히 들르는 가게가 아니라 목적성을 가지고 찾아오는 가게이기 때문이다. 공구상은 근처에 아파트형 공장을 지어서 이주하거나 새롭게 재개발된 건물에서 임대가 잘 안 나가는 5층 정도로 이사를 가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냉면가게 vs 공구상

을지면옥의 물냉면. [중앙포토]

을지면옥의 물냉면. [중앙포토]

흔히 우리는 도심 속 보존의 좋은 사례로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나 소호 지역을 이야기한다. 뉴욕은 오래된 건물을 보존해 더 좋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을지로와 소호는 다르다. 소호의 건물은 100년 전에 이미 5층에서 10층 정도로 철근과 콘크리트로 많은 돈을 들여 제대로 지은 공장건물이다. 이곳은 이미 고층 고밀화된 지역이어서 21세기에도 건물을 그대로 쓸 수 있다. 천정고도 높고 내력벽 없는 기둥구조로 지어져서 새로운 용도로 변형해 쓰기에도 편리하다. 반면 우리나라 강북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2층 정도의 저밀도 지역이고 건축적으로 보존 가치도 거의 없다. 하수도 설비가 부실한 곳도 많다. 우리는 이곳에서 보존할만한 것을 잘 골라야 한다. 을지로에서 낡은 건물은 보존 대상이 아니다. 대신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골목길의 모양은 보존 가치가 있다. 을지면옥의 오래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다면 일부 가로변 벽체나 가구와 식기를 보존하면 된다. 을지면옥의 낡은 실내건축벽면이 얼마나 전통적으로 가치가 있겠는가.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을지면옥 일대 개발을 다음과 같이 제안해본다. 지하주차장 개발을 위해 블록 전체를 철거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골목길 한두 개의 모양만 유지한 상태에서 1층을 디자인한다. 골목길에 접한 건물은 신축되었지만 옛 골목길 모양을 띠고 있어서 걸으면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골목길 주변을 저층으로 지으면서 손해가 난 용적률은 서울시에서 같은 블록 내 다른 건물의 높이제한을 풀어주어서 보전하도록 한다. 을지면옥 같은 중요한 식당은 가게의 대로변 입면을 유지한 상태에서 1층 제자리에 위치시킨다. 공구상들은 가까운 공장형 건물이나 신축건물 5층 상가로 이전시켜준다. 이때 개발회사의 손해 분은 용적률을 높여주거나 분양가 상한제를 풀어주어서 보전하도록 해준다. 서울시는 가게 권리금과 현금장사 같은 요소를 감안해서 기업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양측에서 인정하는 평가기관을 만들어 보상가를 책정한다. 이렇게 시와 개발회사와 입주자가 조금씩 양보를 하면서 창의적 해법을 찾는다면 더 살기 좋은 도시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더불어 사는 화목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현상 속에서 ‘원래부터 나쁜 놈’을 찾는 일부터 그만두어야 한다. 팩트를 수집해야 하고 사건이라는 ‘빛’을 이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분해해서 바라보고 필요한 색을 선별하는 눈을 키워야 한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
하버드·MIT에서 건축 공부를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 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젊은 건축가상 등을 수상했고 『어디서 살 것인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저술활동도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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