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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덩치 눕힐 때 쾌감처럼, 설득력 있게 상식 뒤집을 때 ‘섹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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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호 27면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미국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젊은 시절 ‘더티 해리(Dirty Harry)’라는 드라마 시리즈로 이름을 날렸다. 드라마의 주인공 형사 더티 해리는 여느 형사와는 달리 범죄자를 체포하는 데 과도한 폭력도 불사한다. 그는 특히 육중한 체구의 악당을 때려눕히기를 즐긴다. “나는 덩치가 큰 놈이 좋아. 쓰러질 때 큰 소리가 나거든.” 잠시 후, 악당은 쿵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더티 해리는 쓰러진 거구를 내려다보며 충족감을 느낀다.

거대 담론, 파격적 주장 먹히려면 #지식·분석력·상상력 두루 갖춰야 #서두르면 점쟁이 길로 빠질 수도 #너무 뻔해 논쟁 여지 없는 주장은 #굳이 논술문 쓸 필요조차 없어

그러한 충족감을 느끼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주제를 상대해서 승부를 보려고 하곤 한다. 그들은 한국의 미래 혹은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겠다는 식의 거대담론에 매달리거나, 상식을 뒤집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려 든다. 잘생긴 사람일수록 감기에 자주 걸린다는 것을 증명해보리라. 삼겹살을 많이 먹을수록 살이 빠진다는 사실을 증명해보리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상식을 뒤집어 버렸을 때 오는 쾌감은 이기기 어려운 덩치 큰 상대를 때려눕혔을 때 오는 후련함과 통한다.

어설프게 상식 깨려다간 낭패 보기 십상

그러나 거대한 주장을 입증하거나, 상식을 뒤엎는 일은 쉽지 않다. 당신이 상식을 뒤엎는다면, 일단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저 친구는 왜 저렇게 튀는 거지? 상식을 신봉해 오던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당신의 혁신적인 주장에 물타기를 하려 들지도 모른다. 음, 당신 주장은 새로워 보이지만, 크게 보자면 기존 주장과 다를 바 없어,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있나, 운운. 세상의 많은 혁신적인 주장들이 그런 식으로 중성화 수술당해왔다. 그러나 당신이 확고한 증거를 들이대며 상식을 전복하는 데 성공한다면, 역사가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천동설을 비판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처럼.

혁신적인 주장은 엄밀한 증명을 특징으로 하는 과학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사생아 에드먼드는 사생아를 멸시하는 정실부인 자식들의 상식을 이렇게 뒤집어 놓는다. “사생아가 비천하다고? 사생아는 자연스럽게 불타는 성욕을 만족시키다가 생겨난 존재이니, 지겹고 따분한 침대에서 의무 삼아 잉태된 정실 자식들보다는 낫지!” 오, 어쩐지 그럴듯하다.

그러나 누구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나 셰익스피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중한 체구의 상식에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 오히려 흠씬 두들겨 맞기 십상이다. 상식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것이 그저 익숙하기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경험적 지식과 논리적 훈련과 날렵한 상상력으로 단단히 무장하지 않은 한, 당신이 상식을 쓰러뜨리기 전에, 상식이 당신을 패대기칠 것이다.

그런 패배에 대한 공포에 압도되면, 과감한 도전을 피하고, 덩치가 왜소한 적수만 상대하려 들게 된다. “나는 덩치가 작은 놈이 좋아. 내가 이길 확률이 높거든.” 그리하여 고릴라 대신 코알라를 격투기 상대로 고른다. 그러나 결과가 뻔한 이벤트는 흥미롭지 않다. 쌍권총이 한 자루인지 두 자루인지를 알아보겠다는 연구, 짜장면 한 그릇에는 정말 짜장면 한 그릇분의 탄수화물이 들어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연구가 과연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혹은 연구할 가치가 있을까?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너무 뻔하여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장을 위하여 구태여 논술문을 쓸 필요는 없다. 너무 거대하거나 비상식적이어서 입증될 리 없는 허황한 주장이나,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새삼 천명할 가치가 없는 주장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공부의 목적 중의 하나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contestable) 영역에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그 입장을 남에게 공적으로 설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인가?

한국 사람이 흔히 핫도그라고 부르는 음식은 콘도그(corn dog)다. 미국에서 핫도그라고 부르는 음식은 빵 사이에 소시지를 끼운 것으로, 마치 샌드위치와 비슷하게 생겼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과연 핫도그가 샌드위치의 일종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쟁이 생겼다. 믿거나 말거나, 오랜 논쟁 끝에 미국 핫도그 소시지 협회(National Hot Dog and Sausage Council)는 핫도그가 샌드위치가 아니라는 공식 해석을 제출했다. 우리도 이제, 야채 호빵이 호빵인지 만두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일 때가 되었다.

고래상어는 상어인가, 고래인가? 이름부터 헷갈리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름이 상어라는 단어로 끝나니까 고래상어도 당연히 상어일 거라고? 철갑상어도 이름이 상어로 끝나지만, 철갑상어는 상어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고래상어를 상어로 간주하고 있으나, 고래상어는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어류 중의 하나이므로 고래로 간주될 법도 하다. 또 상어치고는 이빨이 너무 작기 때문에 상어가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이처럼 고래상어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와 유사한 일이 티라노사우루스를 두고 실제로 벌어졌다. 14m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 민첩한 스피드, 그리고 어떤 상대든 씹어 돌릴 수 있는 강인한 이빨로 인해, 한때 지상 최강의 포식자였던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그는 오랫동안 파충류에 가까운 동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상이 더러워서 생긴 오해로 판명 나고 말았다.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의 원병묵 교수가 티라노사우루스가 파충류보다는 조류에 가깝다는 사실을 입증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수학모델을 사용해서 정교하게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 원병묵 교수의 논문(Tyrannosaurs as long-lived species)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렸다. 설득력 있는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 한, 티라노사우루스는 이제 조류의 조상쯤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웃집 토토로로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만화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실제로 움직이는 성(城)이 등장한다. 그 이후 네티즌들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과연 부동산인가 동산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이것이 한갓 인터넷상의 소란에 불과하다고? 건축학과를 나온 일본의 예술가 사카구치 교헤(坂口恭平)는 우리나라 돈 약 30만원 정도를 들여서 ‘움직이는 집’을 짓고, 그것이 새로운 국가라고 주장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닌 적이 있다. 그런 식으로 사카구치 교헤는 국가가 물리적으로 움직일 리 없다고 믿고 있는 많은 이들의 상식에 도전하였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속을 들여다보면, 건반의 움직임에 따라 해머가 현을 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피아노는 현이 있다는 점에서 현악기인가, 아니면 해머로 줄을 때리고 있다는 점에서 타악기인가. 이 역시 논쟁적인 주제다. 그리하여 걸출한 러시아의 음악가 프로코피에프(Prokofiev)는 피아노를 타악기 취급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이러한 주제를 탐구하여, 악기의 분류 체계 자체를 반성하게 만들 수도 있다.

어디 악기의 분류 체계뿐이랴. 어느 대학이 좋은 대학이냐는 분류 역시 반성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소위 좋은 대학이란 대개 신입생들의 입학성적이 좋은 대학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신입생들의 성적에 해당 대학이 기여한 바는 전혀 없다. 진정으로 좋은 대학이란 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들을 받는 대학이 아니라, 재학생들의 실력을 가장 많이 향상시킨 대학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좋은 대학을 재정의하고 나면, 이른바 대학의 랭킹이라는 것도 크게 바뀔지 모른다.

“티라노사우루스, 조류에 가까워” 입증

상식에서 벗어나지만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해내는 사람은 섹시하다. 그런데 덩치가 큰 상식을 때려눕히고 새로운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기하려면, 축적된 경험적 지식, 논리적 분석력, 발랄한 상상력이 모두 필요하다.

그런 것들을 생략한 채 서둘러 섹시해지려고 하는 학인(學人)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점쟁이의 길이다. 그 함정에 빠지면, 딱히 증명하기 어려운 모호한 말들을 가지고 혹세무민을 일삼게 된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하는 거다. “좀처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정치는 겉보기와는 달리 약한 구석이 있네요. 올해 국민들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정리해 줄 새로운 정치인을 만나게 될 겁니다.” 이런 발언은 학자라기보다는 점쟁이의 말을 닮았다. 불안을 이기지 못해 점집을 찾아온 당신에게 점쟁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겉보기와는 달리 속으로는 여린 면이 있네요.” 헉! 어떻게 알았지? 점쟁이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다. “올해 귀인을 만나게 될 겁니다.” 반증 가능성(反證可能性)이 없는 예언의 언어를 남발해 온 학자들도 때로는 학술상을 받는다. 당신이 수행한 연구는 매우 ‘용하기에’ 이 상장과 소정의 ‘복채’를 드립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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