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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나, 아이 낳기 힘든 나이야…너와 맞지 않아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20화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정말로 쉽지 않다. 마흔 다 된 남자가 완전히 낯선 언어를 배우는 일은 더욱 그렇다. 어릴 적 그 언어나 문화에 조금이라도 노출된 적이 있는 사람은 훨씬 쉽다고 한다. 잠재의식 속에 뿌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몇 번의 자극에도 부스스 잠을 깬다는 이론이다. 아랍어는 생긴 모양부터가 너무나 생경했다. 그래도 아침 학원수업을 빠지지 않고 들으니 뭔가 손에 좀 잡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석 달쯤 되니 거래선과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간단한 전화 통화는 가능해졌다.

"아니, 김과장님 전공이 아랍어예요?"
무엇이든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조금이라도 아는 것의 차이는 크다. 아랍어에 무지한 사람들 눈에 난 상당한 수준급으로 비쳤다. 동료들은 나의 성실성과 끈기를 높이 사며 부러워했다.

나만의 직장생활 시크릿
사실 회사생활에서 좋은 점수를 따는 일은 내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 직장에서도 나는 몇 가지 사내 생활지침을 만들어 늘 염두에 두고 살았다. 회사는 성과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직장인들은 다들 주어진 과제를 해내려고 애쓴다. 나는 그 과정에서 모르는 일이나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기면 바로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다가갔다. 그것은 일을 빨리 마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내가 그 일에 얼마나 열심히 매달리는지 남에게 알리는 데도 매우 효과적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청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평소 직장 내 인간관계를 돈독히 한다. 사람마다 관심의 포인트가 다른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 포인트를 알 수 있다. 언젠가 흔한 점심 자리에서 자녀들의 스마트폰 중독 현상이 화제에 올랐다. 프로그램 구매부장은 고1 아들이 잠자는 시간만 빼면 그렇다며 그 결과 시력이 나빠져 보통 고민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얼마 뒤 그 부장에게 아들의 눈 건강에 도움이 될 영양제를 조용히 전달했다. 간단한 편지와 함께. 큰돈 안 들이고 나중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상사를 비난하는 일은 조직생활에서 정말 피해야 할 일이다. 흔히 술자리 안주는 상사 씹는 맛이라고들 하지만 그 화는 언젠가 본인에게 돌아온다. 나도 전 직장에서 그런 일로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내 공을 가로채곤 했던 홍보팀장 욕을 그 팀을 떠난 뒤 몇 번 했는데 나중에 다른 팀에서 다시 만나 지옥 같은 1년을 보내야만 했다. 그 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측은지심으로 대하는 지혜를 얻었다. 얼마나 사정이 어려우면 저럴까, 어릴 적 얼마나 힘든 환경에서 자랐으면 성격이 저렇게 꼬였을까 하고 말이다.

이 땅의 직장생활에서 음주 실력은 여전히 큰 무기다. 그런데 요령이 없지 않다. 여럿이 회식할 땐 술을 열심히 먹지 않아도 된다. 몇 잔만 돌아도 금세 자리가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적당히 먹고 재미있게 놀아주면 분위기 잘 맞춘다는 소리를 듣는다.

"김천 과장은 술자리에서도 말이든 행동이든 실수하는 적이 없어."
이런 평판은 회사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실수하는 게 사람인데, 술자리에서조차 그런 일이 없다니, 얼마나 신뢰도를 높이겠는가.

어느 날 사장님이 불렀다.
"당신을 뽑기 전에 베트남으로 간 유사장한테 몇 번 듣긴 했지만 역시 좋은 멤버 추천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하반기부터 중동팀장을 맡아줬으면 하는데 어때요?"
"감사하지만 저는 이 회사에 온 지 이제 반년밖에 안 됐는데요."
"중요한 건 기간이 아니라 실력과 애티튜드지. 어때 맡아줄 수 있지?"
나는 날아갈 듯 기뻤다. 이렇게 빨리 팀장 자리에 오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나는 퇴근하자마자 누나네 집 근처 그 카페로 갔다.
"누나, 나 지금 집 앞 카페에 있어요. 좋은 소식이 있어 누나에게 가장 먼저 전하려고 달려왔어요."

짧은 메일을 보내고 답을 기다렸다. 물론 오늘도 허탕 칠 수 있다. 올 상반기에 일곱 번이나 메일을 보냈지만 아무 답도 듣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시계는 오후 7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 배고파요. 누나랑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 오늘은 물론 제가 사드릴게요. ㅎ"

다시 메일을 보내고 10분쯤 지났을까. 누나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오~~ 나의 여신은 여전히 눈부시게 우아하구나.

나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한 얼굴로 맞았다. 누나는 예의 그 시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젠 근사한 직장인 티가 줄줄 흐르는데……."
"아, 몇 달 됐다고 그래요."
"아냐, 달라 보여. 도서관에서 볼 때와는 확실히 달라. 자신 있게 보여서 좋네. 근데 무슨 좋은 소식?"

승진 축하해 주세요
"나 팀장으로 승진했어요. 이 회사 온 지 반년밖에 안 됐는데…."

누나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잖아.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

누나는 마침 밖에서 일 보고 막 귀가했으며 아직 저녁 전이라고 했다. 우리는 근처 이탈리아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와인도 한 병 시켰다.
"김천, 그동안 중국집에서 장족의 발전을 했는걸…. 호호"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6개월 만에 누나를 다시 만나고, 좋은 일도 생겼으니까요. 사실 오늘 오면서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내내 걱정했는데……."
전채요리로 토마토 모짜렐라 샐러드가 나왔다.

나는 건배를 하며 누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누나가 가르쳐준 글공부 있잖아요. 사실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회사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제 보고서를 보면 다들 글이 깔끔하고 요지가 분명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고들 해요. 우리 사장님도요. "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 난 늘 미안해했는데……."

누나는 왜 나에게 그렇게 글공부를 못 시켜 안달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눈을 피해 자꾸 와인 잔으로 초점을 가져갔다.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는 것 같아 나는 그동안의 일상에 대해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국내 방송이 만든 재미있는 드라마를 중동지역에 수출하는 일이 주 업무고, 그래서 아랍어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영어를 배울 때 했던 것처럼 아랍영화 한 편을 골라 보고 또 보면서도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있다고도 했다.

"무슨 영환데?"
"‘천국의 아이들’이란 영화인데 아세요? 2001년 국내에 처음 개봉됐는데 2017년에 재개봉했죠."

누나는 모른다고 했다.
"운동화에 얽힌 가난한 어린 남매 이야기인데 정말 가슴이 따듯해지는 이란 영화예요. 누나도 꼭 한번 보세요."
누나는 그냥 그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도 다문화 가정 아이들 봉사해요?"
역시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런 누나에게 이 영화가 딱 좋을 것이라며 다시 한번 강추했다.

"내가 왜 그렇게 김 팀장의 글쓰기 수업에 집착했던지 이해가 안 돼…."
독백 비슷하게 누나가 또 같은 말을 했다. 누나의 마음은 계속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나를 팀장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누나는 바로 알아채고, 팀장으로 승진했으니 그렇게 한번 불러봤다고 둘러댔다.

모든 일은 다 때가 있지
와인의 정량은 둘이 한 병이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니 예외로 해도 무방하리라. 아까는 캘리포니아산 쉬라를 먹었으니 이번엔 카베네 샤비뇽으로 시켰다.
나는 그동안 일곱 번이나 메일을 보냈는데 왜 한 번도 답을 안 했느냐고 물었다.

“모든 건 다 때가 있어. 지난해 우리의 만남은 서로에게 아주 적당한 의미가 되었다고 생각해. 그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어. 나는 돌싱이고 까놓고 말해 이젠 아이를 낳기도 힘든 나이야. 김천 씨는 어머니와 오래 단둘이 살아왔잖아. 결혼하면 당연히 2세를 생각하게 될 텐데 나는 그런 짝으로 맞지 않아. 지난해 하반기 그 좋았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했어.”
누나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2세요? 그건 누나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게 문제가 된다면 누나를 그렇게 쫓아다니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야. 본인은 물론 당연히 어머니 생각도 해야지, 무슨 소리야?”
누나는 본래도 쿨했는데 여섯 달 공백을 지나 지금 보니 더욱 그런 스타일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왜 나왔어요?”
“그동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좀 더 분명하게 말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 마침 팀장 승진도 하고 사회생활 잘하고 있으니 내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더욱 드네.”
“누나가 옆에 있으니 내가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누나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요. 절대로."
나도 단호한 의지를 보이며 식당 문을 나섰다.

출근은 이어졌지만 누나 문제가 계속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던 어느 날 거래처에 이메일을 쓰다 큰 실수를 했다. 계약서에 준하는 메일이었는데 수자 하나에 0을 더 붙인 것이었다. 아랍어는 최근 배웠지만 아랍에서 왔다는 아라비아 숫자는 어릴 적부터 가까이서 접해온 것인데 난데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로 인해 회사에는 10만 달러 정도의 손실이 나게 생겼다. 연봉을 넘는 금액이라 선뜻 책임지겠다고는 소리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았다. 경쟁 위치에 있는 팀장들이 다들 잘됐다고 속으로 고소해 하는 것 같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하자 질시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사장님도 너무 성급하게 팀장으로 승격한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때 장서희 팀장이 나서줬다.

"사장님, 김천 팀장 건은 그야말로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사장님이 넓은 도량으로 품어주시면 김 팀장은 틀림없이 손실 이상의 결과물을 다시 만들어 낼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획팀장에 대한 사장님의 신뢰는 대단했다. 그 덕에 그 문제는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위기에서 구출해준 장서희 팀장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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