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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놀이 하며 "선배, 술 마시러 갈까?" 말한 다섯 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서영지의 엄마라서, 아이라서(13)

몇 개월 전, 아이가 아직 다섯 살이었을 때다. 우리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 원선이(가명)의 엄마와 통화할 일이 있었다. 용건을 마치고 끊으려는데 원선이 엄마가 말을 꺼냈다.

몇 개월 전 아이 친구 엄마와 통화를 하다 들은 이야기다. 아이가 소꿉놀이를 하던 중 "선배, 기분도 안 좋은데 술이나 마시러 가자"라고 했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사진은 아이가 지난 1월 베트남 나트랑의 한 리조트 키즈카페에서 소꿉놀이하는 모습. [사진 서영지]

몇 개월 전 아이 친구 엄마와 통화를 하다 들은 이야기다. 아이가 소꿉놀이를 하던 중 "선배, 기분도 안 좋은데 술이나 마시러 가자"라고 했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사진은 아이가 지난 1월 베트남 나트랑의 한 리조트 키즈카페에서 소꿉놀이하는 모습. [사진 서영지]

“조심스럽긴 한데요. 지난번 키즈카페에서 애들이 제 옆에서 놀아서 소리가 들렸는데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달콤이가 좀 놀다가 원선이한테 ‘선배, 기분도 안 좋은데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개입했어요.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나는 술을 안 마실뿐더러 다른 가족도 최소한 집에서는 이렇게 말할 사람이 없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몇 개월 전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고 떼를 써서 회사에 하루 데려온 적이 있는데 그날 누군가 말하는 걸 들었을까? 그럴 리도 없었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팀은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책상이 있는 데다, 술을 즐기는 팀 선배들은 대부분 휴가를 떠난 상태였다. 출근했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선배한테 술 마시러 가자고 제안할 후배는 없었다.

말을 더듬으며 변명인지 핑계인지를 댔다. “아…. 그렇게 말할 사람이 없는데…. 회사 가서도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텐데…. 아마 TV에서 봤나 봐요. 저도 당황스럽네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고 있을게요”라고 얼버무렸다.

원선이 엄마는 “전에 보니 어떤 아이는 미취학 아동인데 벌써 술을 먹더라고요. 부모가 술을 좋아해서 마실 때 아이한테도 맥주를 조금씩 주던데 그건 좀 아니다 싶더라고요” 식의 얘기를 이어갔던 것 같다.

전화를 끊고 났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가 어디서 그런 표현을 배웠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드라마나 다른 TV 프로그램에서 봤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지만, 당황스러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이에게 키즈카페에서 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아이가 어른 앞에서 표현이나 행동을 숨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사진 pixabay]

아이에게 키즈카페에서 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아이가 어른 앞에서 표현이나 행동을 숨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사진 pixabay]

아이한테 “키즈카페에서 이렇게 얘기했다면서? 어디서 들은 거야?”라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원선이 엄마가 나한테 일렀다고 생각해 다른 어른 앞에서 표현이나 행동을 숨기면 어쩌나, 다른 어른을 통해 본인의 잘못(술 마시러 가자는 표현이 꼭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을 엄마한테 들킨 경우 그걸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아는 척해서 더 잘못된 행동일 경우 드러내놓고 바로잡아줘야 하는 건지 등등 생각이 많아졌다.

결국 그날은 아이에게 아무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가끔 놀다가도 어떤 표현을 하면 신기해서 내가 “그건 어디서 배웠어?”라고 물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가 그랬다고 알려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몰라” 하며 회피하기도 하는 걸 알아서 괜히 숨기려 들까 봐 물어보지 못했다.

몇 개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 아니면 놀이할 때 그런 말을 흉내 내지 않도록 바로잡아줘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어른들이 쓰는 말이라 아이한테 어울리진 않긴 하지만 어른 흉내를 내며 소꿉놀이하는 아이한테 이걸 바로잡아줘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전문가에게 물었습니다

도움말: 홍순아 허그맘동탄센터 부원장(상담심리학 박사)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걸 보면 어울리지 않고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놀게 놔둬야 하는 걸까, 제재를 해야 하는 걸까? [사진 pixabay]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걸 보면 어울리지 않고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놀게 놔둬야 하는 걸까, 제재를 해야 하는 걸까? [사진 pixabay]

이런 경우 제가 모르는 척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어디서 들었는지 물어보는 정도는 괜찮을까요? 어른 흉내를 내는 걸 보면 어른이 보기엔 아이한테 어울리지 않고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아이들끼리 놀 때 놔둬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그런 건 하지 말라고 제재를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부모는 언제나 자녀에 대한 간섭과 감독, 심지어 애정조차도 결핍과 과잉 사이에서 적절함을 유지해야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듯합니다. 어쩌면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그 ‘적당함’의 정도를 가늠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의 언어표현에 당혹스러운 어머니의 마음 또한 훈육의 적정선을 고민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이들은 어른이라는 대상을 통해 모방과 창조적인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이때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자녀의 모방 능력은 그들의 성장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됩니다. 특히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인 6~7세 이전은 부모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언어 노출과 TV 매체, 유튜브, 또래 관계 속에서도 다양한 표현적 언어를 배워 나갑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아이들의 언어 세계는 그리 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억력과 사고력, 모방력, 문장구성력 등이 요구됩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언어를 표현할 때 전체적 맥락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이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을 적절히 파악하여, 대화의 문맥을 통해 의미 자체를 추론하는 것에 능숙해지기까지는 어느 정도 나이에 맞지 않는 언어적 시행착오도 자연스러운 과정이겠지요.

다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을 벗어나는 말과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가 지속해서 표현한다면 다른 차원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부모는 차분하고 단호한 태도로 아이에게 올바른 표현을 사용하도록 설명하고 교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때 부모의 간과하는 태도는 암묵적 동의가 될 수 있기에 적절한 개입이 요구됩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사용할 때는 여러 가지 심리적인 원인이 작용합니다. 어른처럼 흉내 내어 자신도 어른이 갖는 힘을 누려보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내면의 풀어지지 않은 욕구를 간접적으로 표출하고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른처럼 표현하는 말들이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라면, 아이가 원하는 근원적인 욕구와 감정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는 척을 한다면 누군가 자신의 행동을 일렀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행동할 때 위축돼 더 숨기게 되지는 않을까요?
우선 아이가 사용하는 부적절한 언어와 행동이 단순한 모방이고 흥미를 위한 것인지를 살펴보십시오. 누군가를 통해서 들은 얘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소통은 감시당하고 평가받는 관점에서의 개입이라, 아이는 쉽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히려 자신들만의 놀이를 타인에게 개방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후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가 아이들의 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아이들의 자라나는 과정이고,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일지라도 부모가 갖는 엄격한 잣대 앞에서는 그 어떤 아이도 ‘문제아’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결코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환경과 요소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대화에 하나하나 관여하고 개입을 한다면 아이들의 자율성은 무시되고,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적절한 대화의 ‘선’을 찾아가는 기회조차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임상현장 속에서도 부모의 양육 태도가 관여하고 통제하는 역할이 강할 경우엔 아이들의 모래 상자 속에는 엄격함과 감독자의 시선을 상징하는 피규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감시자의 시선 속에서는 내 아이가 다른 집 아이보다 못하다는 무의식적 잣대와 불안이 내재하여 있습니다. 조금만 더 내 아이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준다면 아이 스스로 사회 적응적인 태도를 위한 올바른 선택을 해 나갈 것입니다.

※ 사연을 받습니다

엄마로, 아내로, 딸로, 며느리로 아이를 키우면서 닥쳤던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냈거나 아이의 마음을 잘 다독여준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아이와 관련한 일이라면 어떤 주제라도 좋습니다. 그 이후로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 그 사건을 겪으며 느낀 생각과 깨달음, 그로 인한 삶의 변화 등을 공유해주세요. 같은 상황을 겪는 누군가에게는 선배 엄마의 팁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영지 기자의 이메일(vivian@joongang.co.kr)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보내실 때는 이름과 연락처를 꼭 알려주세요. 사진과 사진 설명을 함께 보내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서영지 기자 vivi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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