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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 논설위원이 간다

칩거 끝낸 유승민 ‘보수’ 부각, 손학규의 ‘중도개혁’ 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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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갈림길에 선 바른미래당 중도정치 실험

지난해 6·13 지방선거 당시 유승민 의원(왼쪽)과 손학규 대표. 두 사람은 지난달 24일 비공개 접촉을 했으나 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였다. [연합뉴스]

지난해 6·13 지방선거 당시 유승민 의원(왼쪽)과 손학규 대표. 두 사람은 지난달 24일 비공개 접촉을 했으나 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였다. [연합뉴스]

작년에 더불어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에게 정계개편 가능성을 물어본 적이 있다. 이 의원은 “그간 정계개편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데 내가 제대로 되는 꼴을 못 봤다”고 했다. 이렇게 냉소할 만도 했다. 한국 정치의 지형을 뒤흔든 정계개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다 연기처럼 흩어진 괴담 같은 시나리오가 몇 곱절은 더 되니 말이다. 작년 6·13 지방선거 이후에도 그랬다.

손 대표는 “개혁 진보 포기 못해 #지금 보수, 진보 따질 땐가” #정두언 “유승민, 탈당 명분 축적” #당 일각선 “한국당행 쉽지 않다” #박주선 등은 민평당과 합당 추진 #8일 연찬회서 노선갈등 불거질 듯

보수통합론을 필두로 말만 무성했지 실체는 없었다. 그러나 잘 보면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 체제의 등장, 이학재 의원 등 적잖은 바른미래당 인사들의 한국당 귀환, 황교안 전 국무총리의 입당,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복당….

자고 나면 멀쩡하던 당이 없어지고 새 당이 서 있던 옛날식 정계개편은 없었지만, 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진영의 ‘리셋’이 완만하게 진행됐다. 리셋의 마지막 퍼즐로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꼽힌다.

유 의원이 ‘결단’하면 나머지 바른정당 출신 의원 7명과 이언주 의원 등의 ‘엑소도스’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유 의원은 지방선거 참패 이후인 지난해 6월부터 8개월간 칩거하며 함구해왔다. 그런 유 의원이 8일 바른미래당 연찬회에 나온다고 한다. 연찬회 참석에 앞서 유 의원의 비공개 행보가 두 건 언론에 노출됐다.

지난달 24일 유 의원은 손학규 대표 및 김관영 원내대표와 오전·오후에 걸쳐 연쇄 회동을 했다. 유 전 대표는 당시 “안철수 전 대표와 통합에 합의할 때의 창당 정신은 ‘개혁적 중도보수’다. 우리는 진보정당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시종 강조했다고 한다. 유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에 “‘보수가 바로 서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는 바른정당의 창당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생각은 여전히 소중하다”는 글도 썼다. 8개월간의 장고를 마치면서 부쩍 ‘보수 정체성’을 부각하고 있는 양상이다.

반면 손 대표의 노선은 ‘중도개혁’이다. ‘개혁 진보, 개혁 보수’가 같이 가야 한다는 내용이라 유 의원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입장을 듣기 위해 유 의원에게 연락을 취해봤으나 답이 없었다. 손 대표와는 연락이 닿았다.

유승민 의원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는 보도가 나오던데.
“나는 유 대표에게 적극적으로 당무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내가 당무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면 지도부와 어긋나는 경우가 있을 텐데 언론이 그 점만 보도하면 당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그건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정체성 문제에 대해 ‘보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 내가 ‘합리적, 개혁적 진보’까지 포괄하자는 얘기를 하는 게 자기와 차이가 있다는 거지. 나는 그게 무슨 큰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창당 정신은 ‘개혁적 중도보수’인데, 나중에 ‘진보’가 끼어 들어왔다는 주장 아닌가.
“안철수 대표가 당시 통합이 급해 적당히 넘어간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말 가지고…. 아니 지금 무슨 보수고, 진보고 따질 땐가. 내가 진보를 안고 가겠다는 거지, 진보정당을 하겠다는 건 아니잖나. 생각해보라. 한국에서 보수-진보는 이념적인 게 아니다. 영남은 보수고, 호남은 진보인 거다. 우리 당에서 진보 배제를 말하면, 호남의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나? 둘 다 같이 가야지.”
유 의원이 정체성의 차이를 얘기하는 이유가 뭐라고 보나.
“글쎄…모르겠다. (활동할 수 있도록) 내가 마당을 깔아주겠다는데도, 유 대표는 원칙을 얘기한다. 마치 자기만 원칙을 가진 것처럼. ”
‘개혁 진보, 혹은 합리적 진보’까지 아우르는 노선을 바꿀 순 없다는 얘긴가.
“그럼, 그럼.”

손학규-유승민 회동이 썩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유 의원을 만난 김관영 원내대표의 얘기도 들어봤는데, 손 대표의 말과 맥락은 같았다.

“유 대표 얘기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합당할 때는 ’합리적 중도+개혁적 보수‘로 합의했는데, 왜 그 뒤 ’진보‘라는 말을 하느냐. 당이 개혁 보수의 한길로 갔으면 좋겠고,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기 전에는 활동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개혁 보수의 한길로 당이 가기는 어렵다. 서로 공존하면서 각자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당의 정체성에 대한 유 의원의 문제 제기는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는 당내에서 노선투쟁을 벌여, 내부를 변화시킨 뒤 서서히 복귀하기 위한 ‘정지작업’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한국당 복당이 실제로는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에 무게를 실은 분석이다. 그에 대한 친박계의 거부감은 여전히 강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는 당과의 이별을 고하기 위해 정체성 차이라는 ‘명분 축적’을 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이런 쪽으로 보고 있다.

정 전 의원은 “유 의원이 바른미래당 안에서 당을 바꿔내는 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당 소속으로 총선 때 대구(동구을)에서 출마하면 낙선”이라며 “원상복귀(한국당행)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오는 27일 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되면, 분명히 외연을 넓히는 좌클릭 행보를 하면서 유승민 의원 한테도 러브콜을 보낼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황 전 총리는 이미 전대 출마를 선언하면서 ‘유승민+안철수’와의 통합 가능성을 묻는 말에 “헌법 가치에 뜻을 같이한다면, 폭넓게 수용할 수 있다”면서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다.

하지만 아직은 변수가 많아 속단할 순 없다. 지금도 ‘개혁 보수’ 노선을 굽히지 않고 있는 그가 어떤 명분으로 한국당과 손을 잡을지 일단 미지수다. 유승민계로 꼽히는 조해진·류성걸 전 의원 등이 한국당 시·도당 차원에서 입당을 거부당한 것처럼 당 중앙에선 트랙을 깔아줘도 ‘교통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변수다.

그래서 바른미래당 일각에선 유 의원이 당을 떠나는 선택을 하더라도 한국당으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소속으로 있으면서 외곽에서 세력을 규합한 뒤 총선을 앞두고 보수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란 분석도 하고 있다. 어쨌든 유 의원의 이탈은 바른미래당으로선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런 암울한 시나리오가 나도는 와중에 당을 흔드는 또 하나의 원심력이 작동을 시작했다.

호남 중진인 박주선·김동철 의원이 최근 민주평화당 권노갑·정대철 고문, 장병완 원내대표와 접촉해 양당 통합을 논의했다는 소식이 그렇다. 회동 후 박 의원은 “거대 1당, 2당의 대안 역할을 하기 위해선 호남이 찢겨선 안 된다. 양당이 서둘러 통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유승민 의원과의 결별을 불사하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 민평당은 안철수 전 의원이 유승민 의원과 손잡는 걸 반대한 국민의당 호남의원들이 만든 당이기 때문이다.

손 대표나 김 원내대표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유 의원에게 또 다른 이탈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화가 급한 상황이다. 손 대표는 “그렇게 한들 안철수-박지원 빠진 ‘도로 국민의당’인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가능성을 일축했다. 박지원-안철수, 두 사람이 다시 같이 가기는 힘들다고 본 셈이다. 김 원내대표도 “옛날 국민의당으로 돌아가는 게 국민에게 뭔 감동을 줄 수 있느냐”고 했다.

하지만 이미 당겨진 불씨가 쉽게 꺼질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열리는 게 8일 바른미래당 연찬회이니 ‘폭풍전야’다. 손 대표 지도부 입장에서 보면 성격이 명확하다. ‘도로 00당’으로 복원하려는 힘과 겨루는 자리다.

강민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