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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지 감수성 잊지 말아야' 안희정 무죄 뒤집은 3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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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비서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강제추행 등)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항소심에서 징역형이 선고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인정 1. "피해자 김지은씨, 진술 신빙성 충분" 

우선 항소심은 1심과 달리 "비서 김지은씨의 진술이 증명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진술에 모순이 없고,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직접 증거인데, 진술 내용을 면밀히 비교하면 그 내용에 일관성이 있다”며 “사건 당시 상황이나 세부적 내용, 당시 피고인의 사무적 행동이나 반응·감정 등에 대해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진술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피해자가 허위 피해사실을 지어냈다거나 무고할 이유나 그것을 증명할 자료가 없다”며 “피고인 측이 제시한 이유만으로는 피해자의 진술을 배척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씨의 진술 신빙성이 인정됨에 따라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지속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주장도 ‘사실’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을 보면 피고인이 피해자의 의사에 명백히 반해 성적 자유를 침해했다고 볼 수 있다”며 “도덕적 비난을 넘어 추행이라고 평가할 만한 행동”이라고 밝혔다.

인정 2. "안 전 지사, 업무상 위력 사용해 간음"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 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 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1심과 달리 안 전 지사가 업무상 위력을 행사해 김씨를 성폭행한 사실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건 당시 현직 도지사였고 임면·휴면·징계권을 가진 인사권자”라며 “피해자가 (피고인의) 절대 권력과 자신의 권력을 인지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수행비서의 업무 내용은 피고인의 심기를 살피고 배려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자유의사를 제압당하기 충분한 유형”이라며 “피해자와 피고인의 관계를 종합하면 피해자가 수행비서로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황을 인식하고 추행하는 등 적극적인 행위를 했으므로 업무상 위력이 증명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업무상 위력의 존재 뿐 아니라 그 위력이 행사된 것까지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권력적 상하관계에 있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며 “피해자에게 자신을 안아달라고 하는 등 적극적으로 피고인이 업무상 위력으로 피해자를 간음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안 전 지사와 김씨가 ‘합의한 성관계’라는 주장도 배척했다. 안 전 지사도 김씨와의 관계가 “정상적인 남녀 성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20살 연상의 유부남이자 직장 상사였고 당시 피해자 정보에 대해 아는 점이 전혀 없었던 점으로 보인다”며 “피고인 스스로 성욕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일 뿐 피고인으로서도 피해자가 이성적 감정 갖고 정상적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인식할 수 있음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인정 3. "법원, 성인지 감수성 잊지 말아야"  

‘성인지 감수성’과 개별성을 인정한 부분도 1심과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 근거가 됐다. 뚜렷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인지 감수성은 일상생활 속에서 성차별적인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한다. 즉, 오직 성별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거나 차별·비하하는 언행에 민감하고 이를 문제라고 여길 수 있는 감수성을 뜻한다. 법원은 더 나아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해 낼 대안을 찾는 능력도 성인지 감수성에 포함된다고 봤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 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환호하고 있다. [뉴스1]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 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환호하고 있다. [뉴스1]

재판부는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는 성차별, 양성평등 등 ‘성인지 감수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가해자 중심의 인식 구조로 인해 피해자가 진실을 알리고 문제로 삼는 과정에서 여론의 불이익과 신원 노출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피해자의 진술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논리적 경험에 기반한 판단이 아니라는 게 법원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또 김씨가 안 전 지사에게 이모티콘을 보내거나 성범죄 피해 후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하는 등 "성범죄 일반 피해자로 볼 수 없다"는 피고인 측의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편협한 관점”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성범죄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특정 반응만을 정상적인 태도라 보는 것은 편협한 관점에 기반한 것”이라고 밝혔다.

법조계 "성범죄 판단시 '피해자 시각' 반영 넓혀" 

법조계에서는 "법원이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 중심의 시각을 기존보다 폭넓게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고 평가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중앙지법의 부장판사는 "지난해 4월과 10월 대법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갖춰야 한다고 판결한 내용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라며 "앞으로 대법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하급심 성범죄 사건에서 이같은 기조가 반영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2심까지 무죄로 판단됐던 A씨의 강간 혐의에 대한 재판을 파기환송하며 ‘성인지 감수성’을 증거 평가의 잣대로 제시한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이 믿을 만한지 따질 때)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해 성폭행이나 성희롱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고 문제로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여론이나 불이익한 처우 및 신분 노출의 피해를 입기도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단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위력의 범위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입법화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찬성 변호사는 “법원의 해석으로만 위력의 범위나 내용을 확대 해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이번 판결의 취지를 반영할 수 있도록 범죄성립 요건을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화하는 입법적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연·이우림·임성빈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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