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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신체를 가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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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동현
이동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동현 산업1팀 차장

이동현 산업1팀 차장

당신은 신체를 가진다. 결코 의심해본 적이 없겠지만 6만년 현생 인류 역사에서 이 권리를 쟁취한 건 불과 340년 전이다. 그것도 나라마다 달라서 100년이 채 되지 않거나 아직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

수백 년 전만 해도 당신의 신체는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 힘센 누군가에 의해, 군주에 의해 수시로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1215년 영국 대헌장이 자연권의 씨앗을 뿌렸고, 1679년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 제정으로 법원의 영장에 의해서만 구금할 수 있게 했다. ‘헤이비어스 코퍼스’는 ‘당신은 신체를 가진다(that You have the body)’는 의미의 라틴어다.

의역하면 ‘당신은 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의지에 반해 신체를 구속당하거나 구금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인류는 이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5만9660년간 싸웠다. 때로 체념하고 분노했으며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다. 왕의 목을 자르고 다시 왕에게-혹은 힘센 자에게-목이 잘렸다. 혁명과 반동의 시간을 거쳐 21세기 현재 전 세계 200여 국가 가운데 제대로 된 신체의 자유가 인정되는 나라는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한국은 헌법과 법률로 신체의 자유를 인정하는 나라다. 스스로 왕의 목을 자르진 않았어도 피 흘려 싸우고 독재자를 몰아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서구사회가 수백 년 동안 이뤄낸 민주주의를 접목해 꽃을 피웠고 열매를 얻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페이스북에, 네이버 뉴스 댓글에, 그리고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구속수사’를 촉구하는 말과 글이 넘쳐난다. 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하겠지만 무조건 구속수사를 촉구하는 주장을 듣고 읽을 때마다 슬픔을 느낀다.

구속영장제도가 만들어진 건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인류역사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향유하게 된 소중한 권리다. 헌법에, 법률에 불구속 수사의 원칙이 보장돼 있다. 재범이나 도망·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때 제한적으로 구속수사하도록 한 건 이 권리의 중요성을 깊이 새겼기 때문이다. 사전적 형벌로, 조리돌림의 의미에서 구속하자는 게 아니다. 희대의 살인마라 해도, 사법농단을 배후에서 조종한 전직 대법원장이라 해도, 국민을 배신한 대통령이라 해도. 그리고 당신조차도.

우리가 쉽게 내뱉는 말 속에 담긴 역사와 피를 기억했으면 한다. 원칙이 사라지면 현실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된다.

이동현 산업1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