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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심석희의 ‘스포츠계 미투’에 응답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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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성문정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수석연구위원

성문정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수석연구위원

국가대표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전 코치로부터 미성년자였던 만 17세 때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지 2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체육계나 정부에서 여전히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가운데 ‘체육계 미투(Me too)’ 사태는 진행형이다. 하루가 멀다고 정부부처와 국회, 지방자치단체와 의회, 대한체육회와 사회단체에서 서로가 문제 해결자인 양 정제되지 않는 대책을 내놓기 바쁘다. 체육계 성폭력 문제 해소를 위해 모두가 앞장서겠다니 좋은 일이지만 물 들어올 때 노 젓듯 한 숟갈 얹혀가는 느낌이다. 참으로 혼란스럽다.

스포츠계 미투 폭로 이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 없어 #성적만능과 엘리트주의가 원인 #이성 선수 밀실 면담 등 금지해야

심석희 선수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던 다음날 문화체육관광부는 긴급 브리핑을 통해 가해자 처벌 강화, 민간 주도 특별조사 실시, 스포츠 윤리센터 설립 방침을 발표했다. 성폭행 장소가 국가대표 훈련장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수촌 합숙훈련 개선 의지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은 성난 민심을 삭히고 정부의 의지에 신뢰를 보내주기는커녕 실망과 불신을 확산시켰다. 지난 16일 후속대책 발표에서 문체부는 사퇴론이 제기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거취에 대해서 국가올림픽위원회(NOC)의 대표이기도 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에 따라 한국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체육 단체 수장이 미성년 선수 성폭행 사건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는 게 옳다고 본다. 많은 국민이 체육계의 성폭력 사태에 대해 개탄하고 책임자 처벌과 강도 높은 혁신을 요구하는 마당에 문체부의 대응은 소극적이다. 피해를 본 선수와 그 가족, 그리고 국민은 정부의 대응에 또 한 번 실망한다. 역시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는 25일 사회관계 장관회의를 통해 범정부 차원의 체육계 성폭력 근절대책 수립방안을 또다시 발표했다. 지난 9일 이후 내놓은 각종 대책만 수십 건이다. 대책이 없어서 성폭력이 지속해서 일어났을까. 어안이 벙벙하다.

시론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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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정부 대책에서도 밝혔듯이 스포츠맨십이 강조되는 체육계에서 성폭력 범죄가 지속해서 발생하는 것은 그동안 한국 체육이 지향해온 성적 만능주의, 우수 선수만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엘리트 체육 우선주의가 원인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권유린 현장은 어린 선수에겐 너무나 가혹했고,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메달에만 환호했던 현실이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만 요구하면서 현재와 같은 구조를 묵인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근본적인 체육시스템 개혁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한국 체육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을 말하며 이슈를 분산시키기보다는 먼저 ‘제2의 조재범’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폭력 방지에 초점을 두고 돌이킬 수 없는 개선책을 만들어야 한다. 원인이 윤리 문제라면 윤리성 확보에 힘을 쏟아야 하고, 폐쇄적 훈련시스템이 문제라면 훈련 시스템을 개방적으로 바꿔야 한다. 처벌이 약해서라면 정부 발표대로 처벌을 강화하면 된다. 그래서 책임질 자가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 지금 당장 정부의 역할이다.

학벌이 중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특기생 제도는 본래 취지와는 달리 지도자가 선수와 학부모를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음이 수차례 밝혀졌다. 폭력을 당해도 대학입학에 필요한 성적을 얻기 위해 지도자에게 복종하고 입을 닫았을 수도 있다. 설령 몇몇 사건처럼 체육 단체나 경기 단체에 고발했지만, 무관심과 온정주의로 조사와 처벌을 쉬쉬하는 행태가 벌어졌다. 이를 보고 기댈 곳 없었던 어린 선수들은 어쩔 수 없이 절망과 아픔의 응어리를 가슴에 묻고 끙끙거렸다. 오로지 1등을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훈련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스포츠는 국위 선양의 수단이 아니다. 이제 이 해괴망측한 훈련 환경을 뜯어고쳐야 한다. 스포츠 선진국에서는 체육 단체 규정이나 코치강령을 만들어 지도자는 이성 선수와 밀실 면담을 절대 금지하고 있다. 한국도 이런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지도자를 선임할 때 강령에 서명하도록 하고 위반하면 즉시 퇴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2차 피해 방지를 위해 폭력 사건을 인지한 선수와 지도자, 경기단체 임직원은 반드시 인지하면 신고를 의무화해야 한다. 미신고 시 가해자에 준하는 처벌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피해 당사자가 될 수 있기에 모두가 나서서 서로를 보호하자는 취지다. 심석희 선수의 용기 있는 폭로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폭로가 성폭력 없는 대한민국 체육 현장으로 완성되길 희망한다.

성문정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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