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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2045년 한·일은 화해해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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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수년 전 워싱턴은 한국과 일본의 전장(戰場)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놓고 두 나라는 미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총력전을 폈다. 국가의 자존심을 건,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휴전도 잠시. 2차전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다. 위안부 합의 취소, 강제징용 판결, 레이더 조준, 초계기 저공 위협 비행이 연달아 터져 나오면서다. 한국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일본 정부, 그런 일본을 꾸짖는 한국 정부의 기 싸움이 한창이다. 미 정부 관계자는 “독도와 교과서 문제로 한일 관계는 더 나빠질 수 없는 바닥(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하(위안부 문제)가 있었다. 진짜 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어느새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깊숙한 곳에 서 있다”고 말한다.

한·일 워싱턴 2차전에 미국은 갸우뚱 #감정·불신 축적 이대로 가단 둘 다 패자

‘워싱턴 2차전’의 판세를 굳이 따지자면 그다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1차전 당시 위안부 문제는 미해결 현안이었고, 우리에게 도덕적 우위가 있었다. 오바마도 은근히 우리 편을 들었다. 2차전은 양상이 다르다. 워싱턴을 설득시킬 명분과 논리가 미흡하다. 우리는 강제징용 판결을 “사법부의 고유 권한”이라 한다. 하지만 워싱턴은 “한국 사정”으로 본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 미국은 의리보다 약속을, 특수성보다 보편성을 존중한다. 합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 하면서 파기도, 재협상도 않고, 중재위원회·국제사법재판소도 안 가겠다는 것에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미국을 통한 우회 압박이 힘든 구조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관심도 지식도 없는 트럼프가 일본을 편들지는 의문이다. 당사국끼리 풀어야만 하는 이유다.

우선 정확한 현상 진단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일본에 대한 감정의 축적, 일본엔 한국에 대한 불신의 축적이 있다. 이제까진 ‘감정의 축적>불신의 축적’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해결이 돼 왔다. ‘한미일 3각 동맹’이란 전략적 판단으로 “밉지만 우리 편”이란 공감대가 유지됐다. 이 구도가 최근 1~2년 사이 확 바뀌었다. 첫째 이유는 트럼프의 동맹 방치, 둘째는 일본의 불신 확대다.

그동안 한국에 대한 불신은 “늘 사과를 요구하고 약속을 뒤집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한국은 미국·일본 편이 아닌 중국·북한 편”이란 불신이 새롭게 추가됐다. 우방국은 돌보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에만 올인한다고 본다. 이전 불신보다 광범위하고 확신적이다. 이로 인해 ‘감정의 축적=불신의 축적’이 됐다. 어느 한쪽이 양보를 않는, 하기 힘든 구도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지지율 올리기, 개헌을 의식한 도발로만 본다. 과거 잣대로만 보니 상황이 꼬인다. 예전 같으면 군 당국끼리 조용히 해결될 레이더 조준 문제가 양국 국방장관이 조종사 점퍼 입고 두 주먹 불끈 쥔 싸움이 된 이유다.

해법은 복잡한 것 같지만 간단하다. 우리는 일본에 우방국이란 믿음을 줘야 한다. 소통을 강화해 불신을 줄여야 한다. 정부가 못하면 민간이 나서야 한다. 일본은 툭하면 국제법만 내세우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감성 외교를 통해 한국의 감정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진행 중인 구도 변화가 굳어지기 전에 말이다. 서로 그게 싫다면, 그걸 못하겠다면 도리가 없다. 서로 패자가 될 뿐이다. 누구나 안다. 승자는 관중석에서 손뼉 치며 반기는 북한과 중국이란 걸.

사상가인 하스미 전 도쿄대 총장은 언젠가 내게 “한일의 진정한 화해는 전후 100년이 지나야 온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설마 했다.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하스미 전 총장이 말한 2045년이 지나도 이 모양 이대로일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